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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슬 Oct 14. 2023

벽창호를 만났을 때 현명하게 대처하는 법

저기, 티타늄이세요?

목적지로 향하는 단 하나의 길. 길을 막는 단단한 벽을 만났다고 가정해 보자. 어떤 사람들은 파편에 다치는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벽을 깨부수려고 할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몇 번 벽을 두드려보다 다른 길을 찾아 빙 둘러 갈 것이다. 무슨 말을 해도 튕겨져 나오는 벽창호같은 사람들을 만날 때, 나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파괴 본능을 꾹 눌러 참은 채로 뒷걸음질 친다. 바늘 구멍 하나 들어가지 않는 태도로 자기가 다 맞다고 하는 걸 보고 있으면 전의를 잃는다. 정확히는 그가 세운 철옹성같은 자기 확신에 금을 낼 자신도, 의지도 없다.


그렇게 나는 ’그래, 그럴 수 있지‘라는 말을 달고 살게 됐다. 마음 속으로는 그를 내 인생에서 영영 추방시킨 후다.


누군가의 자기 확신이 내 업에 대한 침해로 느껴지면 어떻게 해야 할까? “왜 나는 당신의 일에 대해 어쭙잖게 말을 얹지 않는데, 당신은 그런 짓을 하시나요?”라고 맑은 눈의 광인을 자처해야 할까. 아니면 부대끼는 시간을 몇 분이라도 줄이기 위해 하고 싶다는 대로 다 맞춰줘야 할까. 타협은 어느 정도의 포기다. 하나를 쥐려면 하나를 줘야 된다고들 한다. 마음의 평화를 위해 일의 주도성을 내려놓을 것인가. ’내 일‘의 자부심을 지키기 위해 잘 하지도 못 하는 싸움을 할 것인가. 서점에 깔린 수많은 화술 책들은 싸우지 않고도 이길 수 있는 대화법이 있다고 입 모아 말 하지만, 입을 뗄 상상만 해도 명치 끝이 불로 지져진 것처럼 고통스러울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안 알려준다.


한편으로는 이게 이렇게까지 힘들 일인가? 싶기도 하다. 갈등을 힘겨워 하는 성향인데, 나름의 고집은 있다 보니 두 개의 욕망이 부딪치는 것 같다. 불편한 상황을 겪고 싶어 하지 않는 자아는 끝없는 대립이 힘들어 그냥 원하는 대로 해줘버리자고 외친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일의 방향과 최소한의 퀄리티를 포기하는 것은 기싸움 후의 적막 만큼이나 나를 공허하게 만든다. 포기도 습관인데. 하나 둘 포기해버리면 어디서 보람을 찾지? 폭탄은 밖에서 던졌는데 나랑 내가 싸우고 난리다.


드라마 <미생>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그래봤자 바둑, 그래도 바둑.” 주말을 앞둔 금요일 밤, 다음주에 예정된 벽과의 만남이 두려워 마음이 천근만근 무거운 이 순간. “그래봤자 일”이니까, 적당히 잘 털어 내버리자는 마음 반. “그래도 내 일”이니까 최대한 설득해보자는 마음 반. 현명한 나의 사회생활 멘토 가라사대, 벽창호에게 먹히는 건 오로지 모 아니면 도라는데. 여전히 결론이 안 난다.


뒤로, 뒤로, 더 뒤로. 이 일 자체가 아주 작아보일 때까지 줌 아웃한다. 감정을 빼고 상황만 보려고 노력한다. 어쩌면 나는 지금 그가 그동안 보여준 모습때문에 앞으로도 무례하게 행동할 거라는 확증 편향을 가지고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이미 그에 대해 생긴 신념이 그를 담백하게 바라보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 한 번의 미팅과 두 번의 전화 통화로 내 삶에서 영구 추방이 결정된 그에게 ’S급 전과자‘ 딱지를 붙이고 있는 것이다.


혹여나 그가 예상 그대로의 행동을 한다고 해도, 드라이하게 내용을 정리하고 미팅을 종료하면 된다. 그리고 팀에서 내용을 논의한 후, 가부 여부를 메일로 보내는 것으로 갈음하자. 여기에 자기효능감을 개입시킬 필요 없다. 벽을 내가 어쩌지 못 했다고 해서 무능한 게 아니다. 부수지 못할 거라면, 빨리 자리를 뜨는 게 낫다. 대신 말이 통하는 사람들을 설득해 그가 따를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만들리라. 쿠션어를 쓰는 대신, 쓰리 쿠션 전법을 통해 간접적인 완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중얼중얼. 지나가시라, 이미지 트레이닝 중이니까.


높은 하늘 위에 떠 있는 새의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 본다. 정면 돌파할 멘탈은 못 되지만, 어떻게든 우회로를 찾아 보려고 뇌 모양 미로를 뽈뽈거리며 돌아다니는 모습이 가상하다. 명치를 부여잡고 죽지 않기 위해 자기합리화와 희망 회로도 열심히 돌리고 있다. 벽 주변을 한참 헤매다 보면, 그냥 시간이 흘렀다는 이유로 벽이 문이 되어 벌컥 열릴 수도 있다. 그때 나오는 미로는 생각보다 쾌적하고, 길을 막는 장애물이 적을지도 모른다. 세상엔 상식적인 사람이 벽창호보다 훨씬 많고, 내 일은 이것뿐이 아니니까. 이게 제일 중요하다. 내 일은 이것 말고도 아주 많다! 일을 대신 해주는 사람도 없다! 그렇다면 10개의 일 중 보람을 얻을 수 있는 일은 아무리 인색하게 쳐줘도 세 개는 될 것이다. 한 번의 실패로 ‘보람은 어디서 얻지?’ 좌절하는 것 역시 뇌의 속임수다.


벽창호를 만났을 때 현명하게 대처하는 법? 그냥 벽 너머에도 세상이 있음을 잊지 않는 수밖에. 제목을 보고 절박한 마음으로 클릭하신 분들께는 미안하지만, 사회 생활 10년을 했는데도 벽이 스스로 길을 터주는 모세의 기적을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아시는 분 있으면 댓글로 좀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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