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대 중반의 나는 세계 이곳저곳을 돌아다녀야 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즐거운 일도 좋은 사람들도 많았지만 잦은 해외 출장과 유동적인 스케줄에 지쳐가고 있었고 때마침 지인으로부터 명동의 한 사주카페를 추천받았다. 인생 처음으로 사주를 보러 간 그곳에서 들은 첫마디는 역마살이 끼어 있다는 것이었다.
다음에는 좀 더 정적인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타고난 역마살은 어쩔 수 없는 것인지 지금 직장에서도 잡히는 프로젝트에 따라 이리저리 사무실을 옮겨 가며 일을 하고 있다. 그래도 웬만하면 서울을 벗어나지는 않으니 이만하면 양호하다 싶다. 서울 여기저기를 흘러 다니다가 지금은 명동의 한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있다. 나에게 역마살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려준 것도 명동이었는데, 그 역마살 때문에 잠시 명동에 머물게 됐으니 조금 묘한 기분이 든다.
명동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은 대체로 두 가지 분류 중 하나다. 세상 피곤해 보이는 직장인들이거나 호기심에 찬 눈빛으로 두리번거리는 외국인 관광객이거나. 서울이 이렇게나 인기 있는 관광지인가 싶을 정도로 외국인이 정말 많다. 한 지인은 코로나 전에 비하면 이마저도 많이 한산해진 거라고 했지만.
자연히 명동의 온갖 간판과 안내문들은 n개국어로 되어 있다. 보통은 한국어, 영어, 일본어, 중국어 4개 국어가 기본인 듯하다. 높은 확률로 번역기를 돌렸을 그 문장들을 볼 때마다 낯선 나라에서 문득 자신의 모국어를 마주친 사람들의 심정을 상상해 본다. 반갑고 든든할까? 막상 외국에서 보자니 생경한 느낌일까? 어딘가 어색한 번역투부터 눈에 띌까? 어쩌다 오역을 발견하면 그래도 애썼구나, 재미있네, 하는 마음이 먼저일까 아니면 도대체 원래 문장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불편하고 막막할까?
명동역 스크린도어. 영어 안내문 고친 부분이 'Plese'로 오타가 나 있어 대체 뭘 어떻게 고친 건지 궁금했다.
대학원에서 수강한 한 수업에서는 학기 중에 질적 연구를 수행하고 그 보고서를 제출해야 했다. 나는 내 주변의 저연차 한국어 교사들을 인터뷰하여 그들이 교실에서 사용하는 '교사말'을 어떤 이유로 선택하게 되는지를 살펴보았다. 평소 언어생활에서와 달리 교실에서는 특정한 말투나 어휘, 표현 같은 것들을 사용하는지,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혹은 평소와 다름없는 말투를 구사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같은 것들을 질문했다. 메인 분석 요소는 아니었지만 수업을 무슨 언어로 진행하는지, 즉 목표어인 한국어로 진행하는지 영어 또는 학생들의 모어로 진행하는지도 질문에 포함되었다. 모든 수업을 철저히 한국어로 진행하고 있던 한 교사는 한국어 사용 자체를 한국어 수업에서의 기본 전제로 여기고 있었다. 그는 단호하게 '번역어 사용에는 한계가 있다'라고 잘라 말했다.
번역어는 완전하지 않다
번역어는 완전하지 않다. 완벽한 번역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어를 설명하면서 학생들이 친숙해하는 다른 언어의 번역어를 제시하는 것은 손쉬운 방법이겠지만, 100% 맞아떨어지는 번역어란 애초에 없으므로 결국 정확한 의미를 전달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니 다소 어렵게 느껴지더라도 목표어로 수업을 진행하는 것이 그 언어를 가장 잘 가르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오해를 낳는 번역어와 관련하여 많은 한국인에게 친숙할 예로 '보라색'과 'purple', 'violet'의 예가 있다. 한국인들은 처음 영어를 배우면서 'purple'을 '보라색'이라고 배우지만, 막상 'purple'은 한국어 '자주색'에 더 가깝고 한국인들이 떠올리는 '보라색'은 'violet'에 더 가깝다고 한다. 그러니 한국인들은 막연히 'purple'로 적힌 것을 보고 보라색이겠거니 했다가는 원치 않았던 색을 마주할 수도 있는 것이다.
파트타임으로 한국어 화상 강의를 할 때, 기초 한글 강의에서 받침까지 모두 배우고 나면 꼭 알려주는 단어가 '밥'이었다. 초성에서의 'ㅂ'과 종성에서의 'ㅂ'을 설명할 수 있는 단어이면서 한 음절이라 간단하고, 한국 문화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는 좋은 단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밥'은 일단 익힌 쌀을 뜻하지만 식사 자체를 뜻하기도 하기 때문에 빵을 먹든 파스타를 먹든 '밥을 먹는다'라고 할 수 있다는 거라든가, 한국인들은 인사로 으레 '밥은 먹었어?'나 '언제 밥 한번 먹자'라고 말하기 때문에 곧이곧대로 해석하면 안 된다는 거라든가. 한국어에서는 '밥'을 'rice'로만 번역해서는 알 수 없는 부분들이 많다. 영화 <살인의 추억>의 "밥은 먹고 다니냐?"라는 대사를 외국어로 번역하기 어려웠다는 에피소드를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초월번역'이라는 말도 애초에 번역이 완벽할 수 없음을 방증한다. 직역만 해서는 그 의미나 뉘앙스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경우, 번역자의 센스로 발화자의 핵심 의도는 유지하되 의역을 통해 다른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초월번역'이라고들 한다. 이런 번역은 오역 시비에 휘말릴 위험도 있지만, 직역문에 비해 훨씬 자연스러우면서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Netflix 영화 <Matilda>의 'School Song' 가사의 한국어 번역을 보고 이런 걸 초월번역이라고 하는구나, 했던 기억이 난다. 영어 알파벳을 활용한 말장난이 포함된 가사이기 때문에 당연히 한국어로 직역할 수 없었고, 번역가는 한국어로 그 언어유희를 전달하기 위해 많은 고민을 한 듯하다.
만약 번역이 그 자체로 완전하다면 '초월번역' 같은 말은 존재할 이유조차 없다. (에스페란토어처럼 만들어진 언어가 아니고서야) 모든 언어는 그것을 구사하는 사람들의 문화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이다. 특정 문화권에만 존재하는 개념을 지칭하는 단어라면 당연히 다른 언어로의 직역 자체가 불가하고, 여러 문화권에 걸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이라 해도 서로 다른 문화적 맥락을 포함하고 있다면 직역이 오히려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일본 출장에서 현장 일본인 스태프가 붙여 두었던 한국어 안내문. 약간 어색한 문장이 너무 귀여워서 찍어 두었다.
명동의 n개국어 안내문을 보며 생겼던 '해외에서 모국어로 된 번역문을 마주한 외국인들은 어떤 기분일까?' 하는 질문을 다시 생각해 보자면, 나는 어색한 한국어 번역문을 볼 때마다 귀여움을 느끼는 쪽이다. 일단 그 번역문을 준비한 마음이 고맙다. 한국어를 모르니 무슨 표현이 어색한지 자연스러운지도 알 수 없지만 어떻게든 한국인들이 읽었으면 하는 생각에 준비했을 테니까. 그래서 어색한 번역투 표현들이 거슬린다기보다는 귀엽게 느껴지는 것 같다. 나는 신문 기사, 책 같은 '공식적인' 글에서 주술 호응이나 맞춤법이 맞지 않는 문장을 보면 불편해하는 사람인데, 어쩐지 외국에서 발견하는 어색한 한국어 문장들은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만 있으면 되지 뭐!' 하고 너그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세계 각지에서 명동으로 몰려온 관광객들은 어느 쪽이 많을까. 좀 어색한 문장을 발견하더라도 그것마저 한국에 대한 귀여운 기억으로 남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불안한 마음으로 흘러 다녔던 해외 출장들에서 내가 어설픈 한국어 번역문에 왠지 모를 위로를 받았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