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글, 그리고 쓰인 글과 읽힐 글의 차이
너는 말이 편한 사람이야, 아니면 글이 편한 사람이야?
내가 누군가를 알아갈 때 종종 던지는 질문이다. 말과 글은 모두 언어이지만 서로 성격이 정말 다르고 무엇을 더 편하게 생각하느냐가 그 사람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준다고 생각한다.
말과 글은 어떻게 다른가. 음성 언어인 말은 '구어'라고도 하고, 문자 언어인 말은 '문어'라고도 한다. 구어의 가장 큰 특징은 '현장성'일 것이다. 말하는 이와 듣는 이가 함께 있는 바로 그 현장에서 발화되고 이해되며, 일단 발화된 후에는 바로 사라진다. 또 언어 외의 다른 표현 수단이 반드시 수반된다는 점도 특징이다. 목소리의 톤이나 높낮이 등의 반언어적 표현과, 몸짓이나 표정 등의 비언어적 표현이 수반되며 때로는 발화된 내용 자체보다 이 반언어적, 비언어적 표현이 더 많은 것을 말해주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문어의 가장 큰 특징은 '기록'을 위한 수단이 된다는 점이다. 글로 남긴 언어는 말에 비해 오래오래, 여러 사람에게 전달되기가 쉽다. 심지어 글을 쓴 사람이 죽은 이후에도 그의 글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다음 세대에게 전달될 수 있다. 쓰는 이의 시간과 읽는 이의 시간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도 특징이다. 읽는 이는 반드시 쓰는 이가 글을 쓰고 난 후에야 그것을 읽을 수 있다. 단 한 문장의 글이라도 몇 날 며칠에 걸쳐 쓰일 수 있고, 그렇게 쓰인 글을 독자는 몇 분만에 읽어버릴 수도 있다.
나는 말보다 글이 훨씬 편한 사람이다. 말하는 것보다는 쓰는 것이, 듣는 것보다는 읽는 것이 편하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천천히 정리해서 조립하고 마지막까지 검토한 후에 상대방에게 보여줄 수 있다는 점이 좋다. 또 상대방이 보낸 글을 거듭 읽어보면서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 좋다. 그런 면에서 전화보다는 문자나 메신저, 이메일 소통을 훨씬 선호하는 편이다. 특히 일할 때에는 합의 내용을 손쉽게 증거로 남길 수 있어서(!) 더 글을 선호하게 되는 것 같다.
그렇지만 분명 신속성 면에서는 말이 압도적으로 유리하니 전화도 안 하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직장을 비롯한 여러 인간관계에서 바로바로 질문과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글에 비해 오해가 덜 생기기도 한다는 점도 배웠다. 전화든 영상 통화든 그냥 대면으로 하는 대화든, 나는 아무 준비 없이 대화 상황에 놓이면 생각에 비해 말이 느리게 나오는 사람인지라 웬만하면 최대한 말할 내용을 찬찬히 정리해 가곤 한다. 마치 글을 쓰기 전 글의 얼개부터 짜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그냥 '쓰인' 글과 '읽힐 글'은 또 다른 것 같다. 쓰인 글은 단순히 '썼다'는 행위에 대한 결과물이지만, '읽힐 글'은 그 결과물을 누군가가 '읽는다'는 것까지 고려한 것으로 조금 더 많은 노력과 시간이 들어간다. 일단 쓰인 글에서 어색한 문장은 없는지 어긋난 내용은 없는지 다듬고, 예상 독자가 누구일지 생각해 가며 문체를 조정한다. 글을 처음 쓸 때보다 퇴고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들이게 된다. 아무리 고치고 고쳐도 마음에 썩 들지 않아 머리를 싸맬 때도 많다. 그렇게 해서 비로소 완성된 결과물을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것까지가 '읽힐 글'이 쓰이는 과정인 것이다.
브런치를 시작하며 언젠가 내 글이 어딘가에 실리는 일을 상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첫 게재 제안 연락은 생각보다 이르게 받게 되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타이밍이었기 때문에 새로운 제안이 도착했다는 메일을 보자마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매거진 [번역하다]의 편집자께서 내가 쓴 "명동의 직장인은 매일 n개국어 안내문을 마주친다"를 읽으시고 게재 제안을 해 오셨다. 검색해 보니 말 그대로 번역과 관련된 글을 싣는 매거진으로, 주로 번역가 분들이 글을 기고하시는 것 같아 약간 부담도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 글에서 내가 번역어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는 했지만 나는 번역가도 아니고 번역에 대해 깊이 아는 바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어딘가에든 내 글이 실리는 것은 좋은 일이지!' 하는 생각으로 글을 고치기 시작했다. 분명 글을 올리기 전 몇 번 수정을 거쳤는데도 다시 읽으니 흐름이 어색한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특히 글의 첫 부분을 너무 안일하게 시작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뜯어고쳤다. 며칠에 걸쳐 글을 들여다보니 어제는 괜찮았던 부분이 오늘은 별로이기도 했다. 그렇게 생각보다 많은 수정을 거치고 나서야 드디어 '읽힐 글'을 완성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내가 처음 브런치에 올린 글은 '쓰인 글'이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브런치에 '쓰인 글'을 올렸다는 것이 새삼 조금 부끄럽기도 했지만 아마 앞으로도 나는 '쓰인 글'들을 올릴 것이다. 처음 브런치를 시작할 때만 해도 브런치에는 최대한 '읽힐 글'을 올리자고 생각했다. 그런데 '읽힐 글'을 완성하려고 하니 글을 쓰는 속도가 현저히 느려졌다. 쓰는 데에도 힘이 많이 들어가는데, 이걸 또 다 고치려면 얼마나 시간을 더 쏟아야 할지 막막한 기분마저 들었다. 꾸준히 나만의 글을 쓰기 위해 브런치를 시작했는데 이 상태로는 오래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부담을 어느 정도 내려놓고 '일단 발행!'을 목표로 삼았다. 물론 글을 다 쓰고 나서 최소한의 검토는 거치지만, '읽힐 글'을 완벽하게 써내기 위해 무리하지는 않기로 했다. 언젠가 새로운 지면에서 이 글을 소개할 일이 생긴다면 그때 진짜 '읽힐 글'을 완성하자고 생각했다. 브런치에 올리는 건 일단 완결된 형태이지만, 완성되지는 않은 글인 것이다.
매거진에 보낼 원고를 다듬은 건 처음 글을 쓴 시점에서 시간이 꽤 흘렀을 때였는데, 그래서 더 차분하게 완성도를 높일 수 있었던 것 같다. 처음 글을 쓴 그 시점에는 흙탕물을 휘저은 듯 여러 생각이 동시에 부유하고 있었는데, 다시 글을 고치기 전의 빈 시간 동안 흙먼지는 바닥으로 차분히 가라앉고 전보다 맑아진 물이 잔잔하게 고여 있었다. 그 물을 들여다보는 내 시선과 사고도 조금이나마 숙성되었다. 그때 다시 글을 만져주고 나니 이전보다 글이 또렷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써 두니 굉장히 완성도 있는 글을 써낸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다. 다른 사람이 본다면 '겨우 이 정도 글에 이런 거창한 감상을?' 하고 놀랄지도 모르겠다. 조금 더 시간을 들여서, 조금 더 과감하게 어색한 부분들을 도려내고 글의 구조를 다듬었다면 더 멋진 글이 되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더구나 내 글이 이번 호의 커버스토리가 될 줄은 몰랐기 때문에 나에게 이럴 자격이 있나, 조금이라도 더 고칠 걸 그랬나 하는 민망한 마음도 들었다.
그렇지만 이런 아쉬움과 민망함은 어떤 글을 쓰든 늘 느껴 왔던 감정이다. 이 감정들은 나중에 더 좋은 글을 완성시키기 위한 힘으로 남겨둘 것이다. 우선은 누군가 내 '쓰인 글'을 발견하고 그것을 '읽힐 글'로 완성할 기회를 주었다는 데에서 뿌듯함을 최대한 느껴야지. 앞으로 다른 '쓰인 글'들도 '읽힐 글'로 완성할 일들이 생겼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