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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수피 Jul 20. 2023

언어 속에만 존재하는 물고기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리뷰

  때로는 무언가를 명확히 규정하려 할수록 오히려 그 본질이 흐려지는 경우가 있다. '물고기'란 무엇인지 열심히 정의하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물고기'라는 게 정말 존재하는지를 의심하게 되는 것처럼.



  언어학 공부를 하는 사람이라면 높은 확률로 전공 입문 수업 초반에 '언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부딪힌다. '언어? 그거 그냥 말과 글 아닌가?' 하고 넘어가고 싶지만, 그러면 그 '글'과 '말'이란 무엇인지, 동물들이 의사소통을 위해 내는 소리도 '말'이라고 볼 수 있는지  하는 날카로운 반문에 마주하게 될 것이다. 이 질문은 언어의 구성 요소나 기능, 그리고 언어의 일반적 특성 등에 대한 내용으로 나아가기 위한 도입인 셈이다.


  저 내용만 가지고도 전공 수업 두세 시간이 드니 이 글에서 언어의 정의와 관련된 내용을 구구절절 모두 풀 생각은 없다. 이 글에서 언급하려고 하는 것은 언어의 일반적 특성 중 '분절성'에 관한 것이다. 언어의 일반적 특성으로는 '자의성(또는 임의성), 창조성, 추상성, 사회성, 역사성 그리고 분절성'을 들 수 있다. 이 중 분절성이란 분절할 수 없는 것을 분절해 내는 언어의 성질을 뜻한다.


  분절성은 크게 두 가지 층위에서 논의된다. 첫째, 음성으로 된 언어는 본질적으로 분절될 수 없는 연속적인 소리이지만 그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특정 음소들로 분절된 불연속적인 것으로 파악한다. 사람들이 외국어를 배울 때 본인의 모국어에 없는 음소를 만나게 되면 그것이 어떤 소리인지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이 분절성과 관련이 있다. 둘째, 이 세계 자체는 아날로그처럼 분절될 수 없이 연속적이지만 사람들은 언어를 통해 세계를 디지털처럼 불연속적인 것으로 인식한다. 예를 들어 색은 본래 연속적인 스펙트럼이지만 사람들은 임의의 기준점을 잡아 색을 구분하는데, 그 기준점은 언어마다 다르다. 언어권마다 무지개 색의 수를 다르게 인지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나는 이 언어의 분절성이라는 개념을 정말 좋아한다. 분절성이야말로 언어의 본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명확한 경계선이라는 것이 없는 이 세상을 설명하고 서로 소통하기 위해 사람들은 언어라는 칼을 빼들었다. 하지만 세상은 본질적으로 나눠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언어를 거치는 순간 본래 세상의 원본은 언제나 얼마큼씩 손실되고 누수되기 마련이다.


  원어민이 아닌 화자가 구사하는 매끄럽지 않은 언어를 두고 'broken'이라는 표현이 사용되곤 한다. 깨어지고 부서진 언어라는 것이다. 그런데 '분절성'에 대해 곱씹다 보면 모국어 화자가 구사하는 것이든 아니든 애초에 언어 자체는 부서져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진짜 전하고 싶어 하는 메시지는 매 순간 조각조각 언어가 부서진 틈으로 흘러나가고 있다.


  그렇다면 언어는 대체 무슨 쓸모가 있느냐고? 부서져 있을지언정 언어는 인간이 이용하는 표현 수단 중 가장 확실히 약속된 것이다. 언어만큼 많은 사람들에 의해 널리 합의되고, 넓은 분야의 주제를 다룰 수 있는 의사소통 수단은 찾기 힘들다. 그래서 외국어든 모국어든 언어라는 수단을 잘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은 늘 뜨거운 관심의 대상이 된다. 넓게 보자면 최근 불거진 수능 국어 비문학 문제 관련 논란이라든가, AI 챗봇이 얼마나 사람처럼 말하는지 또 어떻게 해야 더 사람처럼 말하게 할 수 있을지에 대한 논의도 이와 관련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에는 저자와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학자의 이야기가 수필인 듯 르포인 듯 마치 여러 색의 실로 뜬 목도리처럼 얽혀 있다. 이 책이 어떤 책인지 쉽게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다른 종류의 이야기들이 한데 얽혀 마지막 장을 향해 달려가는데, 책을 가로지르는 여러 이야기들 중 특히 나를 사로잡은 것은 바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었다.

수많은 미묘한 차이들을 "어류"라는 하나의 단어 아래 몰아넣은 것이다.
...
"어류"라는 범주가 이 모든 차이를 가리고 있다. 많은 미묘한 차이들을 덮어버리고, 지능을 깎아내린다. 그 범주는 가까운 사촌들을 우리에게서 멀리 떼어놓음으로써 잘못된 거리 감각을 만들어내는데, 이는 상상 속 사다리에서 우리가 차지하는 제일 윗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
과학적으로 좀 더 논리적인 일은 어류란 내내 우리의 망상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어류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류"라는 범주는 존재하지 않는다. 데이비드에게 너무나도 소중했던 그 생물의 범주, 그가 역경의 시간이 닥쳐올 때마다 의지했던 범주, 그가 명료히 보기 위해 평생을 바쳤던 그 범주는 결코, 단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다.
(pp.272-274)


  우리는 어류와 어류가 아닌 것을 쉽게 구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구분된 '어류'라는 범주가 굉장히 과학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상 같은 '어류'에 속한다고 간주되는 생물들 사이에는 생각보다 큰 차이가 있고, 그 차이들을 면밀히 조사해 보면 결국 그들을 하나의 범주로 묶기에 무리가 있을 정도라고 한다. 그러니까 '어류'는 자연에 의해 필연적으로 나뉜 범주라기보다, 인간들이 직관상 비슷해 보이는 생물들을 임의로 모아 놓은 개념인 것이다. 어류와 어류가 아닌 생물의 경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으므로 어류라는 범주도 분절이 불가능하다. 그저 사람들의 언어에서만 일부 생물들이 '물고기'로 분절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결국 물고기는 물속이 아니라 언어 속에만 존재하게 된다.


  인간의 직관이 틀렸다고 하더라도 단번에 '어류'를 포기하기란 쉽지 않다. '어류', '물고기'는 철저히 인간의 편의를 위해 고안된 범주이기 때문이다. 그 분류가 잘못되었다고, 사실 물고기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미 그 범주를 편안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게 당연하다. 설령 납득하더라도 굳이 일상생활에서까지 그 범주를 버릴 필요가 있나 싶을 것이다.


"맞아요. 직관에 어긋납니다!" 자칭 "횡설수설하는 분기학자"인 릭 윈터바텀이 내게 한 말이다. 그도 그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는 30년 넘게 학생들에게 실제 자연 세계가 우리가 설정한 범주대로 분류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시키려 노력해왔다. 그리고 그 관념이 학계 밖으로는 도저히 퍼져나가지 않는 것을 보면서 크게 실망했다. 그는 자기가 대적하기에 너무 센 적수를 상대하고 있는 것 같다고 걱정스러워했다. 그 센 적수는 바로 직관이다. 그는 사람들이 결코 편안함을 진실과 맞바꾸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p.276)


  이제 머리로는 그 범주가 잘못된 기준에 의해 생겨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나 역시 '어류'라는 범주를 버리고 살지는 않을 것 같다. 실생활에서는 직관만으로 어류와 어류 아닌 생물들을 구분하며 살아도 아무 문제가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주변 사람들도 나와 비슷한 기준으로 어류를 구분하며 살고 있기 때문에 이 기준을 혼자 폐기하는 것은 의사소통 전략상으로도 유리할 게 없다. 그러니 나는 계속해서 부서진 '어류'라는 단어를 붙들고 의사소통을 이어 나갈 것이다. 그 단어로 설명되지 않는 미묘한 차이들이 부서진 틈으로 끝없이 새어 나온다 할지라도.



  이러한 인지부조화에 대한 해결책을 굳이 찾고 싶다면, '원형(prototype)'이라는 개념이 실마리를 제공해 줄지도 모르겠다. '원형'은 인지언어학에서 논의되는 개념인데 흔히 '머그컵'의 예로 설명된다. 우리는 어떤 것을 '머그컵(mug)'이라고 부르는가? 또 어떤 것을 '머그컵'과 구분하여 '그릇(bowl)'이라고 부르는가? 통상적인 '컵'에 비해 크고 넓적한데 손잡이가 달려 있다면 그것도 '머그컵'이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니면 그것부터는 '그릇'이라고 보아야 하는가? '머그컵'의 범주에 걸쳐 있는 다양한 사물들에 이 질문들을 반복해서 던지다 보면 결국 '머그컵'과 '그릇' 사이에는 명확한 경계가 없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그 애매한 경계 위에는 '더 전형적인' 머그컵과 '덜 전형적인' 머그컵이 남아 있을 뿐이다.


  '원형'은 어떤 범주의 가장 중심적인 표상으로서 그 경계선은 명확하지 않고 불분명(fuzzy)하다. 특정 범주의 원형에 가까워질수록 가깝다면 '더 전형적인' 것이 되고, 원형에서 멀어질수록 '덜 전형적인' 것이 된다. 이를 어류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어류와 어류 아닌 것의 범주는 매우 불분명하지만, 사람들의 인식 속에는 어류의 원형이 자리 잡고 있으며 그 안에서 더 전형적인 어류와 덜 전형적인 어류들을 떠올릴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고등어라든지 연어는 더 전형적인 어류인 반면,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언급된 폐어나 실러캔스는 덜 전형적인 어류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일상적인 언어에서는 '물고기', '어류'라는 말을 원형에 가까운 전형적인 어류를 지칭하는 데 쓰면 된다. 이렇게 하면 직관 속의 원형을 구분 기준으로 이용함으로써 우리는 여전히 '어류'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다.


  물론 여전히 '어류'라는 범주 자체가 과학적으로 타당하지 않다는 반박이 있겠지만... 과학자가 아닌 나에게는 면밀한 분류보다는 직관에 어긋나지 않는 언어 사용이 더 중요하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정확하지 않은 범주를 사용한다는 일말의 죄책감(?)을 '원형'이라는 개념을 끌어오면서 살짝 달래 보는 것이다. 역시 나는 '물고기'가 언어 속에만 존재하지 않고 물속에도 존재해야 마음이 편한 것 같다.



읽은 책

룰루 밀러(2021),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곰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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