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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수피 Jul 11. 2023

불의 언어를 응원해

 <엘리멘탈> 리뷰

  보는 한국인마다 '이건 한국 영화가 아닐 리 없다'는 감상평을 남기는 픽사 새 애니메이션 <엘리멘탈>. 스포일러에 별로 개의치 않는 성격이라 감독 피터 손의 자전적 이야기가 들어 있으며 한국적 요소가 많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안 채로 보러 갔다. 그래서인지 앰버의 가족으로 대표되는 불 원소와 웨이드의 가족으로 대표되는 물 원소 사이에 형성된 아슬아슬한 권력관계에 한껏 몰입하게 되었다.


  누군가는 '불 원소들이 좀 차별을 받는 것 같긴 하지만 다들 생업도 있고, 또 웨이드네 가족도 악의는 없는 것 같은데 그게 무슨 권력관계냐'라고 할지도 모른다. 물론 웨이드네 가족이나 다른 물 원소들이 '야호! 이제부터 불 원소들의 권력을 뺏겠어!' 하고 힘을 빼앗아온 건 아니다. 그렇지만 집단 사이의 권력관계의 형성이라는 건 늘 개인과 개인 사이의 관계보다 미묘하면서도 견고한 법이다. 이 글에서는 특히 '언어'의 관점에서 이들의 권력관계를 확인할 수 있었던 장면 두 개를 다루어 보려고 한다.



  첫 번째 장면. 앰버의 부모가 파이어랜드를 떠나 엘리멘트 시티로 이주해 올 때, 그들은 불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직원에 의해 이름을 잃었다. 그들이 새로 받은 '버니'와 '신더'라는 물의 언어로 된 이름은 엘리멘트 시티의 일원이 되기 위해 필요했던 자격이다. 반대로 말하면 불의 언어로 된 이름은 엘리멘트 시티의 일원이 되기 위한 자격이 될 수 없었다는 뜻이다. 이는 엘리멘트 시티에서 물의 언어가 갖고 있는 권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특정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그 안에서 통용되는 언어로 된 '공식적인' 이름을 가져야 하고, 다른 언어로 된 이름은 아무리 평생 사용해 온 것이라 하더라도 '비공식적인' 이름이 되는 것이다.


  한국인으로서 다른 언어, 특히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들과 교류를 하다 보면 내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기 어려워하는 사람들을 아주 자주 만날 수 있다. 그래서 해외 출장이 잦은 일을 할 때에는 아예 영어 이름을 지어서 그 이름으로 나를 소개하기도 했다. 편의성 면에서 여러 모로 효율적인 선택이었고 나는 아무 불만도 없었지만, 누군가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영어 이름을 갖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면 얘기는 달라질 것이다. 기득권의 언어로 발음하거나 받아 적기 어렵다는 이유 때문에 스스로가 어떻게 불릴지 선택할 권리를 잃는 것은 너무 씁쓸한 일이다. 



  두 번째 장면. 앰버가 웨이드의 집을 방문했을 때, 웨이드의 가족 중 하나가 엠버에게 "우리 말 잘하시네요"라는 말을 칭찬이랍시고 한다. 앰버는 태어난 것도 자란 것도 엘리멘트 시티였고 당연히 엘리멘트 시티의 언어를 모어로 구사해 왔는데 말이다. 엄연한 '내국인'인데 '외국인' 취급을 받은 것이다. 그 칭찬을 들은 앰버가 떨떠름하게 "태어날 때부터 사용한 언어였으니까요."라고 대꾸하자 칭찬을 한 웨이드의 가족은 머쓱해한다. 그에게는 어떠한 악의도 없었다. 그저 엘리멘트 시티에서 이국적이라고 여겨지는 외모의 앰버가 그의 모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니까 정말 선의의 칭찬을 한 것이다. 바로 여기서 그가 기득권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의 칭찬 속에는 '이 집단에 안정적으로 속해 있는 내가 보기에, 이 집단에 속해 있지 않은 네가 우리의 언어를 매우 잘 구사하니 신기하고 대단하다'라는 시선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칭찬은 아시아계 사람들이 영어권 나라에서 흔히 접하는 상황이기도 하지만, 한국인들이 무의식적으로 많이 행하는 차별이기도 하다. 한국은 더 이상 단일 민족의 나라라고 보기 어렵지만 여전히 동아시아계가 아닌 인종의 사람은 당연히 '외국인'이라고 인식되는 면이 있다. 그들 중에는 한국 국적을 가진 사람도, 한국인은 아니지만 상당 기간 동안 한국에서 거주한 사람도, 한국인과 가족을 꾸린 사람도 적지 않게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사람들이 아무리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할지라도 냅다 영어로 말을 걸고 보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다.


  언젠가 한 방송에서 유튜버 조나단이 다들 자신의 외모만 보고 영어를 잘할 것으로 기대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하는 장면을 보았다. 요즘은 좀 덜한 것 같지만 그가 처음 방송에 얼굴을 비기 시작할 때에는 꼭 영어를 잘하냐는 질문이 나왔고, 누가 봐도 외국인인 그가 영어보다 한국어를 능숙하게 사용한다는 사실이 의외의 캐릭터성으로 강조되곤 했다. 실제로 그는 콩고민주공화국 국적을 가진 외국인이기는 하지만 어릴 때부터 한국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한국어를 가장 편하게 구사한다고 한다. 나는 조나단에게 그런 질문을 쓰고 말한 사람들에게도 악의는 전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잘 몰랐을 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게 차별이라고 인지한 순간부터 우리는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영화에서 물의 원소는 엘리멘트 시티에 가장 먼저 이주해 온 원소이고, 그래서인지 웨이드의 가족을 비롯한 물의 원소들은 대체로 상류층의 이미지로 그려진다. 따라서 엘리멘트 시티의 공용어도 물의 언어일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엘리멘트 시티에서 불의 언어는 완전한 '외국어'다. 웨이드가 불의 언어를 전혀 알지 못하며 앰버를 만나기 전까지 배울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 그 방증이다. 공기의 언어나 흙의 언어에 대해서는 자세히 나오지 않아서 섣불리 말하기 어렵지만, 분명 그들의 원래 모국어 역시 외국어로 여겨질 것이다.


  이 설정을 현실 인간 세상으로 갖고 온다면 물의 언어는 영어에 대응된다. 영어는 여러 국적의 사람들에게 모국어이기도 하지만 세계 각지에서 통용되는 만국 공통의 언어이기도 하다. 이런 언어를 링구아 프랑카(lingua franca)라고 한다. 링구아 프랑카는 각자의 말로 소통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공통의 의사소통 수단으로 약속한 언어를 뜻한다. 누군가의 모국어로서의 영어와 만인의 링구아 프랑카로서의 영어는 자연히 결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어떻게 결이 달라지는지, 언어 교육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정확성(accuracy)'과 '유창성(fluency)'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자. '정확성'은 얼마나 정확하게, 오류 없이 목표어를 구사하는지에 관한 요인이다. '유창성'은 정의하기에 따라 다를 수 있으나, 여기서는 일단 목표어를 통해 얼마나 자연스럽게 의사소통할 수 있는가와 관련된 요인 정도로 정리하겠다. 아주 단순하게 말하자면 영어를 누군가의 모국어로 생각하고 접근한다면 자연히 모어 화자 수준의 '정확성'을 염두에 두고 교육이 이루어지기 쉽지만, 링구아 프랑카로 여기고 접근한다면 실제적인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유창성'에 더 관심을 기울일 수 있을 것이다. 문득 엘리멘트 시티의 공용어 교육은 어느 쪽에 초점을 맞추어 진행되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영어를 떠올릴 때면 영어 모어 화자들은 만국 공통의 언어를 따로 배울 필요가 없다니 얼마나 편할까 하는 부러운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이미 영어는 사실상 영어 모어 화자들의 손을 벗어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한국어는 그 정도의 위치를 차지한 적이 아직 없으므로 나로서는 실제 영어 모어 화자들이 이에 대해 실제로 어떻게 느끼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여러 집단을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 인간인 만큼 특정 집단의 언어를 구사하는 능력이 곧 권력으로 이어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 권력에서 비롯되는 차별을 경계하는 것은 더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원래 이름은 지키지 못했지만 자신들의 언어를 딸에게 물려준 루멘 부부를, 가족 호칭('아슈파')만큼은 부모님의 언어를 사용하는 앰버를, 앰버가 알려준 불의 말('디쇽')을 소중히 기억하는 웨이드를, 그 모든 원소들에 의해 간직되고 새로 구성되어 나갈 불의 언어를 응원하며 글을 마친다.



본 영화

피터 손(2023), <엘리멘탈(Element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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