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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ne Gray May 05. 2023

제3언어로 연구하기

우리 지도교수님은 나를 소개할 때 자주 '이 친구는 지금 제3언어로 공부를 하는 중이야' 라는 말씀을 종종 하신다. 나의 제 1언어는 한국어이고, 제2외국어로 배운 건 영어이니, 불어가 제3언어가 맞긴 하다. 그렇다고 영어를 기깔나게 잘하는 건 아니지만... 그런 말씀을 하실 때마다 듣는 나는 '그러니 얘가 언어가 부족해도 좀 너그러이 이해해줘라' 라는 부정회로와 '그러니 얘가 얼마나 힘들고 대단한 일을 하는거겠니' 라는 긍정회로가 동시에 돌아간다. 어떤 뜻이 되었든 난 교수님이 나의 그런 상황에 대해서 인식을 하고 계시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프랑스도 한국만큼, 아니 어느 측면에서는 한국보다 더 맞춤법에 미친듯이 민감한 나라라 언어 사용에 굉장히 예민하다. 학과 홈페이지에도 맞춤법 주의하라는 공지가 올라와 있을 정도다. 그런 나라의 사회과학 학계이니 엎친데 덮친 격(?) 이라고 볼 수 있다. 인문계 박사생들은 간혹 맞춤법이 조금만 틀려도 교수가 지도를 거부하는 경우까지 겪는다고 한다... 최악이다...


아무튼 우리 지도교수님은 내가 제3언어로 연구하는 게 불쌍해 보이시는 건지, 대견해 보이시는 건지 언어사용에 대해서 굉장히 관대하신 편이다. 1년 차 첫 미팅 때, 학교에서 제공하는 프랑스어 언어 수업이 있으니 혹시 관심있으면 들어보라고 아주 조심스럽게 이야기하신 것 빼고는 의사소통에서 말을 절든, 맞춤법을 틀리든 아주 예민하게 지적하지는 않으신다.


불행 중 천만다행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연구생활에서 겪는 언어 스트레스에서 자유로워지지는 않는다. 하... 왜 나는 영어로 해도 힘든 일을 불어로 한다고 했을까. 유학 온 지도 벌써 4년차가 되어가지만 여전히 언어 때문에 고통받고 언어 때문에 후회한다. 그 와중에 외국인 랩 동료들은 왜 이렇게 기가 막히게 불어를 잘하는 지... 나 빼고 다 잘하는 것 같다. 가끔은 내 불어 실력을 듣고 연구실 사람들 모두 '얘는 이 실력 가지고 도대체 어떻게 박사를 하고 있는거지' 하는 것 같아서 움츠러들기도 한다. 가끔은 교수님이든 동료들이든 허심탄회하게 내 속마음을 이야기하고 수다를 떨고 싶은데 내가 할 수 있는 말도, 이해할 수 있는 말도 제한적이라 늘 대화가 겉돌고 단절된다. 석사 때 수업 도중에 뛰쳐 나가 화장실에서 울고, 수업 끝나고 집가는 지하철에서 울고, 그러던 시절보다는 멘탈이 강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언어의 장벽은 무겁고 거대하다.


이거 말고도 외국에서 부족한 언어로 살면서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는 고난 스토리가 한보따리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속상한 건 연구에 관련된 나의 의견 표현을 제대로 못할 때, 연구에 관한 디스커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때다. 사실 평소에 아카데미 용어만 듣고 쓰기 때문에 일상회화는 더할나위 없이 훨씬 쓰레기 수준이긴 하지만, 일상회화에서 못 알아듣는 속상함은 언어 때문에 연구 토픽을 깊이 다루지 못하는 거에 비할 바가 못된다. 인내심 깊은 지도교수님이셔도, 내가 미팅 내내 딴소리 하고 못 알아 들어서 질문에도 묵묵부답일 때 (안 들리게) 한숨을 쉬신다... 그리고 그 주제에 대해서 그냥 넘어가버리신다. 미팅 끝나고 돌이켜보면, 아! 그 말이 이 말이었구나 할 때가 너무 많은데, 대부분 그 코멘트들이 연구에 굉장히 크리티컬한 지적인 경우가 많았다. 그나마 돌이켜보고 늦게라도 깨달은거면 다행이지만, 그 와중에 이런 식으로 놓친 말들이 얼마나 많을까 싶다.


이래서 졸업은 하겠냐? 할 때가 무수하게 많다.

그래도 마음 속으로 내가 여기 있을만 하니까 있겠지, 그 생각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있을만 하니까 있겠지. 아니면 진작에 잘리든 쫓겨났든 하지 않았을까? 혹자는 그렇게 말하더라. 언어는 틀이다, 그 너머에 있는 메시지가 훌륭하다면 누구라도 귀를 기울인다.


최근 활동하는 국제개발 단체에서 30년 가까이 일해오신 은둔의 고수, 손문탁 박사님께서 ChatGPT같은 머신러닝 언어앱 개발을 너무 환영한다고 하셨다. 그 덕분에 제3세계 학생들이 언어의 제약없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국제적인 커뮤니티에도 전달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이다. 아이디어만 있으면 언어 따위는 더이상 문제가 되지 않게 되었다고 말이다. 그 말을 듣고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진심으로 마음에 손을 얹고, 내가 언어능력이 부족해서 나의 생각을 잘 전달하지 못해서 속상했던 건가, 혹은 빈약한 생각을 멋들어지게 전달한 만한 언어 능력이 부족해서 속상했던 건가 생각해봤다.


이 곳 프랑스에서 박사까지 졸업하기로 했으면, 불어는 숙명처럼 따라붙는 과업일테고, 그에 더 나아가 학자로 살기로 결심했다면, 영어는 필수다. 그럼 내 인생에 한국어 말고도 두 개의 언어를 숙명으로 떠안고 살아야 할텐데 할 수 있을까? 언어에 그리 재능이 있지도 않은 인간 나부랭이가?


잘 모르겠다... 자신없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물러날 방법이 없다.

그러니 울면서 이고지고 가는 수 밖에.


2023년 5월 파리 몽수히 공원, 나뭇잎이 분홍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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