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탁 잡아서 쓰레기통에 던진대 그럼 되잖아
놀이터는 다 비슷하게 생긴 것 같은데 조금씩 다르다. 다른 아파트에 있는 놀이터에 놀러 가며 마치 놀이터 도장깨기를 하는 재미가 있다. 남편이 늦게 오는 날 하필(?), 저녁에 아이가 새로운 놀이터를 가고 싶어 했다.
다른 아파트 단지 내 놀이터에서 아이와 둘이 놀았다. 놀이터에는 학원이 끝난 시간이었는지 초등학생들이 꽤 많이 있었다. 사람들이 많은 곳이라 몇 발짝 떨어져 주시하고 있었다. 그때 초등학생 1-2학년쯤 되어 보이는 여학생 둘이 아이와 나 사이를 지나갔고, 아이에게 다가가니 아이 눈이 동그래지더니
"방금 지나간 언니가 등을 이렇게 꼬집었어" 하고 울었다.
그 아이를 보니 이미 미끄럼틀을 타고 저만치 뛰어가고 있었다. 팔에 아이를 낀 채
"야 너 이리 와 치마 입은 너 이리 와"
놀이터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다 볼 정도로 소리쳤다. 최근에 그렇게 크게 소리친 적이 있었던가.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 아이가 왔다. 학원 가방을 메고 동그란 안경을 썼고 통통한 체격에 영락없는 초등학생이었다. 지금부터 나의 이도 저도 아닌 대처이올시다.
"너 아이 꼬집었니?"
"네? 아니요"
"네가 꼬집었잖아. 아이 등"
"아니요.. 아기가 있어서 두 손으로 살짝 터치한 건데요"
"너 진짜 아니야?"
"네.. 진짜요"
순간 내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나더랬다.
'학생 손에 뭔가를 끼고 있었는데 살짝 터치하면서 찔렸나'
'내가 소리치면서 추궁한다고 아동학대로 신고하면 어쩌지'
'CCTV에도 잘 안 찍혔을 것 같고 얘도 겁먹은 것 같은데..'
만약 여러분이라면 그 상황에서 학생에게 어떤 말을 했을까요?
"알겠어 네가 아니라고 하니까 믿을게. 그런데 한 번만 더 하면 진짜 혼날 줄 알아"라고 전 했어요. 정말 앞뒤도 안 맞고 누구 말을 믿는다는 건지.
그 아이는 "네"라고 하고 갔다. 내 옆에 서 있는 아이얼굴을 보니 이 아이에게 뭐라고 얘기를 해줘야 할까, 엄마가 자기 말을 안 믿는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자기를 꼬집은 언니는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는다고 세상이 그런 거라고 생각하면 어쩌지 라는 생각들.
"아인아 엄마는 아인이가 꼬집었다고 한 말을 믿어. 그건 의심치 않아. 엄마가 저 언니를 믿겠다고 한 건...."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집에 돌아와 목욕을 하려고 옷을 벗겼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아이 등에 정말 빨갛게 꼬집은 자국이 선명했다. 실제로 피들이 고인 자국이었다.
그 순간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다. 누구보다 나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아이 말을 믿기로 했으면 100% 밀고 나갔어야 했다. 내가 조금이라도 '아니면 어쩌지'라고 생각했으니 그냥 끝낸 것이 아닌가. 그건 너무 비겁했다.
목욕하기 전에 아이에게 "정말 아팠겠다. 이렇게 아프게 꼬집었을 줄 몰랐어. 자기보다 어리고 약한 사람이면 더욱 돌봐줘야 하는데, 그 언니는 그걸 모르나 봐" 했더니 "응 엄마한테 안 배웠나 봐" 란다.
그 사건이 있은 뒤 아이의 상처는 다행히 아물었고, 어제 다시 저녁 놀이터 도장 깨기를 이어나갔다.
"그때 갔던 놀이터 갈까? 아니면 다른 놀이터 갈까?" 물었다.
"그 언니 만나러? 나중에 그 언니 만나면 내가 태! 권! 도! 할 거야.
그 언니가 미끄럼틀 타고 달리면 아빠가 탁 잡아서 쓰레기통에 던진대 그럼 되잖아"
아이의 이 말을 한동안 맴돌았다.
내가 태! 권! 도! 할 거야.
피해자는 '다음에는 내가 뭘 어떻게 해야지' 하지만 할 수가 없다. 뉴스를 보아도 뒤에서 가격하거나, 갑자기 찌르거나, 차로 치는데 뭘 어떻게 한단 말인가. 더 크게 울거나 엄마한테 그 언니가 자기 세게 꼬집은 거 맞다고 얘기하는 것 밖에 할 수 없을터. 그 상황에서는 엄마가 해야 했다. 엄마, 경찰, 검찰이 말이다.
아빠가 탁 잡아서 쓰레기통에 던진대
사건의 날, 남편도 화가 나서 걔를 다시 만나면 쓰레기통에 탁! 던진다고, 아이에게 말을 했다. 표현이 거칠어서 남편에게 그런 말 하지 말라고 눈빛을 주는데 아이는 너무 웃기는지 꺄르르르 웃었다. 그 이후로 아이는 신나서 '아빠가 그 언니 쓰레기통에 넣는대'라는 이야기를 몇 번이나 더 했다.
생각해 보면 아이는 내가 그 상황에서 남편의 말처럼 그 언니를 번쩍 들어 쓰레기통에 넣어주길 바랐을지도 모르겠다. 그 학생도 쓰레기통 정도에 들어가야 다음에 또 안 하지 않을까. 나의 고작 큰 소리 몇 번은 이도 저도 아니었다. 과연 그 학생은 그날 이후 다른 아이들을 꼬집었을까 안 꼬집었을까.
난 아직도 그 상황으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대처했어야 했을지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잠을 자려고 누우면 혼자 대사 연습도 해보곤 한다. 어떻게 하면 그 아이가 잘못을 느끼고 우리 아이가 덜 상처받을까.
아이에겐 힘들겠지만, 그 자리에서 언니에게 아프다고 미안하다고 말해달라고 요구하고 그러면 안된다고 말하라고 이야기해 줄까 한다. 동생을 꼬집는 마음의 근간에는 약자인 아이들은 침묵한다는 생각이 있지 않을까. 그러면 아이 스스로 쓰레기통에 불쾌했던 마음을 던져버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아이가 앞으로 강자에게 미안하다고 말해달라고 요구할 수 있고, 스스로 불쾌했던 마음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릴 수 있는 아이로 자랄 수 있기를. 오늘도 놀이터 도장깨기를 이어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