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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인 Sep 24. 2022

이야기 나무, 그 옆에 벤치 하나


우리집 바로 옆 공원에는 이야기 나무가 살았다.

   아파트 단지 사이에 있는 작은 규모의 공원. 그곳에는 낮이고 밤이고 사람들이 찾아왔다. 운동 기구에 몸을 맡기는 아저씨, 지붕이 있는 정자 아래에 모여 미주알고주알 떠드는 할머니들, 신이 난 강아지에게 이끌려 걸음을 재촉하는 청년, 해맑게 뛰어 노는 아이들.

   공원은 평온했지만 동시에 삶의 활기로 가득했다.


이토록 평범해 보이는 공원에는 나만 아는 특별한 구역이 하나 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숨겨져 있어서 특별한 것이 아니라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그곳의 특별함을 눈치챌 수 없어서 (솔직히 말하면) 내 눈에 그곳이 특별하게 보여서 특별해진 곳이었다. 머글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9와 3/4 승강장처럼.

   그곳에는 벤치 세 개가 둥그런 원의 형태로 줄지어 놓여 있었고, 그 앞에는 커다란 나무가 우뚝 서서 둥그렇게 모여 앉은 벤치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뜻 보면 청중들 앞에 서서 발표하는 사람 같기도 했고, 깊은 밤 잠 못 드는 아이들을 둘러 앉히고는 밤새도록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는 노인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다. 나는 덜덜 떨고 있을 발표자보다는, 다정한 노인에게 마음이 기울어 그 나무를 볼 때마다 나무의 형상 위로 누군가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어느 노인의 뒷모습을 겹쳐 보곤 했다. 이상한 상상이 계속되던 어느 날 나는 나무에게 별칭을 하나 지어주었다. 이야기 나무.


공원을 지날 때마다 나는 이야기 나무를 향해 눈을 맞췄다. 그 시선 안에는 다양한 사람과 물건이 함께 담기곤 했다. 이야기 나무는 주로 해지는 저녁과 자정이 가까운 밤에 인기가 많았다. 누군가의 품이 필요한 사람들이 주로 활동하는 시간 대여서였을까.

   미색의 가로등이 켜지면 이야기 나무의 곁에는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사람, 멍하니 밤하늘을 바라보는 사람, 함께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는 이들이 있었다. 가끔은 혼자 울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울고 있는 사람이 찾아왔을 때에는 이야기 나무의 그림자가 그의 등을 쓰다듬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때로는 사람 대신 물건만 있을 때도 있었는데, 가장 많이 발견된 물건은 소주병이었다.

   이야기 나무가 곁을 내어주는 것들을 보면서 생각했다. 어쩌면 이야기 나무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시간보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시간이 더 많을 수도 있겠다고.

   벤치에 누군가 앉아 있는 모습을 볼 때면 궁금해졌다. 이야기 나무는 어떤 이야기를 듣고 있을까. 그리고 그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이야기 나무가 사는 동네를 떠나온 후에도 오래도록 잊지 못하는 장면이 있다. 아마 영영 기억하며 살게 될 그 장면.

   바람이 선선하던 가을, 나는 한 사람과 함께 산책을 하고 있었다. 정처 없이 걷는 것을 좋아하는 우리는 공원에서 다른 공원으로, 근처의 또 다른 공원을 찾아 발걸음 옮기며 긴 산책을 이어갔다.

   산책을 하다 보면 산책길의 풍경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산책을 하고 있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하게 된다. 혼자 걸을 때 자꾸만 머릿속으로 혼잣말을 되뇌게 되는 것도, 동행자가 있을 때면 계속 실없는 말을 주절거리게 되는 것도 모두 그래서이다. 훗날 떠올려보면 그때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할 그런 말들.

   그날의 산책 역시 뱉음과 동시에 사라지는 말들이 거리에 흩뿌려지고 있었다. 우리는 주로 사는 것에 대해, 사는 것의 고단함에 대해 별 의미 없는 푸념들을 늘어놓았다. 진심이 깊이 침투하지 않은 말은 모두 휘발되어 버리기에 우리의 말들은 허공에 공허하게 날렸고 나는 그것이 싫지 않았다. 서늘한 바람 속에서 가볍게 날아갈 대화를 하는 이 순간이 나에게는 일종의 해방처럼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시간 남짓을 걷다가 나는 의외의 말 한 마디에 나의 온 신경이 집중되어지는 것을 느꼈다. 물론 아무런 티를 내지 않으면서. 항상 누군가의 비밀을 듣게 되는 것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오곤 한다.


   나한테는 사랑이 일이야.

   나는 연애를 일하는 마음으로 해.


그는 다정한 사람이었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때면 상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는 사람. 함께 있는 사람이 편안할 수 있도록 많은 것을 배려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선함을 알아챈 많은 여자들은 그를 좋아했고 그는 고등학생 시절부터 20대 중반이 될 때까지 부지런히 연애를 이어왔다. 지난 연애의 횟수를 따져보니 열 손가락이 가득 찰 정도였지만, 그는 자부했다. 매순간 최선을 다해 사랑에 임했음을. 어느 것 하나 허투루였던 적이 없었음을.

   나는 연애를 한 순간도 쉬지 않는 그가 신기했다. 이 사람과의 관계를 끝내고 다음 사람과의 관계를 시작할 때 그 마음이 어찌 그리 빨리 옮겨지는지, 재빨리 옮겨 붙은 마음이 어찌 저리 활활 불타오를 수 있는지. 때로는 그의 의중을 의심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의 의뭉스러운 마음은 나만의 것이었고, 그의 연애는 늘 그래왔듯 열렬히 진행 중이었다.

   그런 그에게 사랑이 일 같은 것이라니. 사랑을 제1의 가치로 삼는 줄 알았던 그의 입에서 뜻밖의 표현이 등장하여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하지만 그는 매우 담담하게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았다. 아직 겨울이 오지 않았는데 그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나오는 것 같았다.


   나는 가면을 써. 사람들을 대할 때 그 사람에게 맞는 가면을.

   진짜 나는 보여주지 않아. 그게 모두에게 편하니까.

   나는 편안하고 싶어.

   내가 택한 편안함은 가면을 쓰는 거야. 한 명이 가면을 쓰면 많은 것들이 해결돼.


하지만 가면을 쓰는 그에게도 어떤 품은 필요했다. 그가 그 자신으로서 온전히 안겨있을 수 있는 품. 내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단 한 명의 품. 그는 그래서 연애를 한다고 했다. 사랑이 필요하다고 했다. 마치 일을 하듯 모든 에너지를 쏟아 연애를 지속하고, 사랑이 자신에게 있음을 매순간 확인한다고 했다. 사랑을 통해 힘을 얻지만 사랑에 너무 많은 힘을 써버려 자신의 모든 것이 타버릴 때도 있다고 고백했다.


우리는 수많은 나무 아래를 지나며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나눴다. 주로 듣는 자리에 섰던 그가 말을 했고 나는 그를 바라보며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지는 석양빛이 그의 얼굴에 내려 앉았다. 빛이 어른거리는 그의 얼굴을 나는 오래도록 지켜 보았다. 그가 가진 사랑의 불꽃이 가능한 오래도록, 따뜻하게 그를 데워주기를 바랐다. 그리고 언젠가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 홀로 불을 켜고도 그 안에서 안온함을 느낄 그의 모습을 꿈꾸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야기 나무 옆을 지나며 생각했다. 내가 그에게 잠시라도 작은 품이 되어주었기를. 당신의 이야기 나무는 못 되어 주더라도 언제든 잠깐 앉아 쉬었다 갈 벤치 같은 사람은 될 수 있기를.

   아무도 모르게 혼잣말로 되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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