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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인 Oct 19. 2022

나뭇잎처럼 가로수 잎들처럼


아침 바람에 나뭇잎들이 흔들린다. 가지 끝 작은 잎들까지 조용하게 기쁘게 흔들린다. 흔들림들 사이로 빛들이 흩어져서 반짝인다. 나무 아래로 사람들이 지나간다. 혼자서 둘이서 걸어간다. 노란 가방을 멘 아이도 종종걸음으로 걸어간다. 모두들 가로수 잎들처럼 흔들린다. (김진영, <아침의 피아노>, 한겨례출판, 2018)


거리에 떨어져 있는 나뭇잎 세 개를 주워다 집으로 데려온 적이 있다. 빨간 잎, 노란 잎, 초록 잎. 잎에 묻은 잔먼지들을 손가락 지문으로 문대 털어내고 책상 위에 나란히 놓아 한참을 바라봤다. 

   얼굴들. 그 모습이 마치 누군가의 얼굴 같았다. 맨질맨질 빤히 웃고 있는 얼굴. 나는 그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고 얼굴 하나하나를 좋아하는 책 사이에 꽂아두었다. 언젠가 책을 펼치면 이쪽을 향해 웃고 있을 미소 하나를 떠올리면서. 


책 한 켠에 고이 모셔둔 얼굴들처럼, 내겐 마음 깊이 간직해둔 몸들도 있다. 빛들 사이로 아름답게 흔들리던 몸들. 

   어떤 몸들은 나를 멈추어 세운다. 나를 붙드는 몸은 대개 시간이 묻어 있는 몸이다. 몸의 형태나 움직임을 보는 것만으로 그가 통과해온 시간을 떠올릴 수 있는, 그런 몸. 나는 그런 몸을 발견하면 몸 앞에 서서 몸의 몸짓을 천천히 눈에 새긴다. 잠시라도 그의 몸이 내 몸 안에 들어왔다 갈 수 있게 마음의 자리를 열어둔다. 

   몸은 그 사람(혹은 존재)을 나타내는 인장 같은 것이었다. 무엇에 마음을 썼는지, 어떤 행동을 반복했는지, 무슨 표정을 지으며 살았는지. 몸은 모든 것을 담고 있었다. 그 흔적들이 오랜 시간 깎이고 새겨지고 굳어져 그 사람(혹은 존재)임을 나타내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인장이 되었다. 내게 몸은, 시간이자 세계이자 마음이었다. 그 앞에서 나는 절로 공손해질 수밖에 없었고 온 마음을 다해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살다가, 내가 작아지고 좁아지는 것을 느낄 때면 나는 내 안에 머물다간 몸들을 떠올렸다. 그들의 몸을 빌려 가난한 마음뿐인 내 몸을 조금씩 넓혀갔다. 


한때 내가 마음에 두고 자주 들여다보았던 몸은 만두를 빚는 몸이었다. 지하철 역 앞을 나오면 뜨거운 김을 뿜어내는 오래된 만두 가게가 있었다. 나는 가끔 그곳으로 가 만두와 오색 찐빵을 주문하곤, 가게 바깥에 서서 안쪽에서 만두를 빚어내는 어느 노인의 몸을 가만히 보았다. 

   노인은 체구가 작았고 눈에 띄게 등이 많이 굽어 있었다. 굽은 정도가 90도에 가까워 서있는 노인의 모습을 옆에서 바라보면 그 형태가 네모 상자의 한쪽 모서리를 떠올리게 했다. 

   굽은 등은 노인의 작은 체구를 더욱 작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노인의 몸을 만두 빚는 테이블과 더욱 가까워지게 했다. 노인의 몸과 만두 빚는 테이블은 테트리스의 두 블록이 모양을 맞추어 하나로 연결되듯 안정감 있게 들어맞았다. 불완전해 보이던 몸이 오랜 시간을 함께 해온 사물과 만나 비로소 안정을 찾는 듯 보였다. 

   노인은 항상 단정한 조리복 차림이었다. 2평 남짓의 좁은 주방에서 홀로 일을 했지만 자신의 일에 예우를 갖추듯 늘 깔끔하게 다려진 조리복을 입고 만두를 빚었다. 노인이 가끔 바깥을 향해 고개를 돌릴 때면 노인의 눈을 잠시 볼 수 있었는데, 단단하고 또렷한 눈빛이었다. 고통의 시간이 쌓이고 쌓여 단단한 굳은살이 박인 듯 그의 눈빛에서 아픔은 보이지 않았다. 

   굽은 등과 단단한 눈빛을 지닌 몸. 나는 그 몸을 볼 때마다 저려오는 목과 어깨의 감각을 느끼며 몸이 지나온 영겁의 시간들을 가늠해보았다. 내 영영 알지 못할 그 수많은 시간들을. 노인의 몸은 어떤 무게들을 감당해야 했을까. 그의 눈빛에서는 언제부터 아픔이 사라졌을까. 노인의 몸은 무엇을 지키기 위해 매일 만두 빚는 테이블 앞에 섰을까. 

   끝내 알지 못할 질문들을 떠올리다 보면 어느새 나는 집에 도착해 있었고, 식탁에 앉아 종이상자를 열면 그 안에는 정갈한 만두와 오색빛깔 찐빵이 하얀 김을 내며 나를 반기고 있었다. 


노인은 알까. 당신의 시간과 나의 시간이 겹쳤던 그 잠깐의 순간을 내가 가끔 꺼내어 본다는 걸. 

   언젠가 덕수궁 돌담길을 지나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어쩌면 생이란 그저 수많은 장면들의 연속일지 모른다고. 그 장면들 안에는 내가 모르는 수많은 얼굴들과 몸들이 있고, 나는 그들을 그저 스쳐 지나가는 풍경 정도로 여기고 있을지 모른다고. 

   그런데 그들은 내게 그저 풍경일 뿐이었을까. 


거리에 쌓인 단풍잎을 발끝으로 톡톡 차내며 걷다가 생각을 거두고 고개를 드니 눈앞에 세 명의 할머니가 있었다. 연분홍 원피스와 밀집모자를 맞춰 입은 그들은 서로의 손을 잡고 단풍잎 위를 사뿐히 걷고 있었다. 살랑이는 바람 때문인지 들뜬 마음 때문인지 그들의 몸이 이리저리 바람결에 흔들렸다. 찬란하게 부서지는 햇살 아래 아름답게 흔들리던 몸들. 나는 그 뒷모습을 마음 한 켠에 저장해두었다. 언젠가 다시 꺼내보며 미소 지을 날을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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