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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인 Oct 20. 2022

R에게


오래 전에 썼던 노트를 펼쳐보았어요.

별안간 아무 이유 없이 손때 묻은 물건에 눈이 향할 때가 있잖아요.


그곳에는 당신에게 쓰다 만 편지가 있었습니다.

아무런 인사말도 없이 이런 문장으로 시작된 편지였어요.


당신은 나를 보고 용기를 얻었다고 말해줬어요.
소심하고 용기 없는 당신 마음 속 한 켠에도 나를 닮은 얼굴이 있었다고요.


첫 문장을 보니 당신에게 편지를 쓰지 않고는 도저히 잠들 수 없었던 날이었던 것 같아요.

편지는 이렇게 이어지고 있었어요.


우리 앞에 놓인 문제가 정말 오래도록 이어져 온 문제였다는 것을 모두가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그것이 잘못되었다 말하지 않았다고요. 당신도. 당신의 선배도. 당신의 후배도.

서로가 서로를 힘들 게 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것에 대해 말할 자신이 없어 오히려 못 본 척, 모르는 척 하는 것을 택했다고요. 그런데 이제는 그러지 않겠다고 당신은 말했어요. 내가 보여준 말과 행동이 당신에게 용기를 주었다고 했어요. 그렇게 말해주어 고마워요.

사실 나는 두려웠어요. 내가 이런 말을 하고, 이런 행동을 해도 괜찮을까. 이런 나를 당신이 계속 좋아해줄까.

그럼에도 나는 그 말을 해야 했어요. 그 행동을 해야 했어요. 설령 당신이 나를 더 이상 좋아하지 않을지라도. 내가 당신과 함께 일할 수 없게 될지라도. 나는 병들어 가는 사람들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요. 문제를 문제라고 말하지 않고 버틸 수 없었어요. 왜냐하면 내 몸이 병들어가는 게 느껴졌거든요.

그런 나에게, 당신이 들려준 말은 이런 나라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다독임이었어요. 내가 당신 곁에 있어 다행이라고 말해주는 당신이 있어서, 내가 지금까지 이곳에서 당당히 서있을 수 있었어요. 내가 나일 수 있게 용기를 주어 고마워요. 내 곁에 함께 서있어 줘서 고마워요.


편지를 읽다 보니 우리가 뜨겁게 대화했던 여러 밤들이 떠올랐어요.

편집실에서, 퇴근길 공원에서, 또 어떤 밤에는 자정이 다 되도록 핸드폰을 부여잡고…


잘 아시겠지만 그때의 저는 화살촉 같은 사람이었어요.

내가 원하는 것이 무언인지, 가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분명히 알고

그것을 향해 앞만 보고 달려가는 사람.

그렇기에 제 화살촉은 빗나가는 일이 거의 없었고 매번 명중하는 과녁을 볼 때마다

스스로 엄청난 명사수인양 자신감이 가득 차 있는 그런 사람.

당신은 그런 저를 보고 빛이 난다고 해주었지요.


저에 대한 믿음이 크고 단단해질수록

제가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의 면면들 또한 날로 부풀어오르던 시기였어요.

차갑게 날이 서있던 시기. 뜨겁게 분투했던 시기.


그런데 한참이 흐른 뒤 그때를 다시 돌아보니

제가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건, 큰 주저함 없이 활시위를 당길 수 있었던 건

당신이 많은 장애물을 걷어내 주었기 때문이었어요.


어쩌면 제 말과 행동이 당신을 향할 수 있었음에도 당신은 기꺼이 제 과녁이 되어주었죠.

그래서 마음 놓고 활을 쏠 수 있었어요.

그때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지만 이제야 확신을 가지고 말합니다.

그 시절 용기를 낸 사람은 제가 아닌 당신이었다는 걸요.

용기를 내주어 정말로 고맙습니다.


당시 우리가 자주 했던 말이 하나 있지요. 약자들의 배려.

저는 그 말이 무척 싫었어요. 어째서 약자가 강자를 배려해야 하는지.

주어와 목적어가 뒤바뀐 이상한 문장이라고 여겼어요.

그런데 세상은 여전히 이상한 문장을 마치 세상의 이치라는 듯 받아들이라 하지요.

참고, 견디라고.


그럴 때마다 기울어진 시소가 자꾸만 떠올라요.

처음부터 한쪽으로 기울게끔 설계된 이상한 시소 말이에요.

저는 바닥에 닿아있는 시소 한 쪽에 앉아 반대 편에 하늘 위로 떠있는 누군가를 향해 소리치곤 했지요.

이건 부당해. 옳지 않아. 그리고 시소가 잘못되었다면서 시소 밖으로 내려오곤 했어요.

나에겐 아직 올라탈 시소가 많이 남아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다른 시소일지언정, 결국 시소는 시소라는 걸 미처 알지 못한 채로 말이에요.


당신과 멀어지는 동안, 저는 많은 실패를 했습니다.

시소에 올랐다 내려오기를 반복했고

내가 향해야 하는 과녁이 무엇인지 몰라 허둥대기도 했어요.

실패라는 단어를 마음에 품고 사는 날들이 많았어요.

제 것이 아니라 생각했던 그 단어를 말이에요. 참으로 우습지요.


그런 날들 사이로 저는 이따금 당신을 생각하곤 했답니다.

우리가 같은 곳에서 함께 이야기하고 누군가를 향해 소리쳤던

그때 그 순간들을 그리면서 말이에요.


그리고 알게 되었어요.

“약자들의 배려”에서 약자가 배려하는 대상은

강자가 아니라 같은 약자였다는 사실을요.


나도 약자였지만, 당신도 약자였다는 걸.

용기에는 다양한 얼굴이 있다는 걸.

소리치고 싸우는 것뿐만 아니라 기울어진 균형을 맞추기 위해 기꺼이 함께 한 자리에 서는 것 또한 용기가 가진 또 다른 얼굴이었다는 걸 말이에요.


저는 이 편지를 당신에게 보낼 수 있을까요.

당신이 이 편지를 받게 된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요.


아마도 저는 영영

이 편지를 제 서랍 속에 간직할 것 같습니다.


그러다 가끔, 당신이 그리운 날에

혹은 어떤 용기가 간절히 필요한 날에

혼자 슬며시 꺼내어볼 것 같아요.


그리고 뒤에 무언가를 또 적어내려 갈 수도 있겠죠.


끝나지 않는 편지가 제게 있다는 사실에 왠지 마음이 차오르는 것을 느껴요.


당신은 그동안 어떻게 지내왔나요.

내가 모르는 당신의 하루들이 나는 무척 궁금합니다.


당신을 그리워하고 좋아하는 이가 이 세상 어딘가에 살아 있다는 걸

부디 알아주시기를.


고맙고 존경합니다.



어느 가을, 지현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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