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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비 Dec 19. 2015

오후 한 시 부터 밤 열 시 까지, 이태원.


주미는 눈이 예뻤다. 또렷한 쌍커풀이 시선을 끌었고 짙은 눈썹은 자유분방하게 뻗어있었다. 한낮은 더웠는데 주미는 긴 팔에 긴 바지를 입고 나왔다. 밝게 웃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멀리서 나를 알아보고 어깨를 톡톡 치더니, 반가워! 하고 말했다. 

내가 알아서 시켜도 되지? 하고 웃는 모습이 좋았다. 어, 그럼요. 그런데 저 매운건 잘 못먹어요. 하고 건넨 말에 너는 나도 잘 못 먹어! 하고 대답했다. 우리는 음식 이야기를 했다. 집에서 요리를 자주 한다는 이야기도, 하지만 가장 맛있는 건 남이 해준 요리라는 말도 했다. 주말인데 왜 데이트 안하고 나랑 만나냐고 물었다. 애인하고 많이 멀어졌어요? 했더니, 너는 머쓱해하며 어제 헤어졌다고 말했다. 

비밀이야,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서로가 마음이 떠났다는 말도 했고 상대방이 맘에 들어하는 다른 사람이 생겼다는 말도 들었다. 아직 어리니까, 이런저런 사람들 많이 만나보는게 좋지. 나 같이 나이 많은 사람 말고. 하며 허허 하고 웃었다. 에이 그래도 나중에 전화 올 걸요? 너 만한 사람 없었다면서 잘 지내냐고 분명히 전화한다? 까르르 웃으며 위로했다. 웃음으로 위로가 되었다면 좋았을텐데. 

음식은 맛있었다. 자극적이지 않았고 시즈닝이 훌륭한 스테이크도 일품이었다. 연신 입에 넣으며 맛있다, 맛있다 하는 말을 되풀이했다. 조용했다. 공간이 주는 마술이었는지, 그 곳에 머물던 사람들 덕분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던 곳이었다. 


이태원은 자주 들러도 잘 모르겠는것들 투성이였다. 대로변은 영락없는 서울인데 골목 사이사이로는 골목마다 낯선 풍경이 펼쳐진다. 화려한 원색의 간판부터 대체 무얼 파려는 건지 알 수 없는 가게들. 길가에 테이블을 늘어놓고 손님을 맞는 가게들. 우리는 사거리 모퉁이의 한 펍에 들어갔다. 꿀이 들어간 맥주 한 잔씩, 그리고 두툼한 감자튀김.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를 했고, 들었고, 맞장구를 치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흐르는 시간이 야속하다는 생각을 했다. 진부하지만 정말 야속하기 짝이 없었다. 우리가 할 말들은 많았는데 시간은 단어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좋은 말을 골라 쓰고 싶었는데 흐르는 시간에 좇겨 뭐라도 일단 말해야 했다. 어쩌면 나만 그랬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태원 자주 와? 아뇨 그냥... 가끔? 여기 와선 밥먹고 술 먹은 것 밖에는 없네요. 아, 요 근처에 재즈바 있는데 저녁에 매일 공연을 해요. 거기도 가끔 공연보러 갔었는데. 그래? 같이 갈까? 정말요?

시작이 그랬듯 오후의 일정도 갑자기 정해졌다. 원래는 밥만 먹고 집에 일찍 가려고 했는데, 주미는 생각보다 더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조금 더 친해지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쌍커풀 있는 눈을 다시 좋아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래 아직은 눈만 좋아하는 것으로 해 두자.

여섯시 쯤, 해는 이미 건물 너머로 몸을 숨겼고 하늘은 주홍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올댓재즈로 향하는 길은 한낮보다 서늘했고 우리는 신이 나 발걸음을 빨리했다. 아까 갔던 골목에서 반대로 가면 돼요. 좁은 계단을 오를 때면 꼭 벽장 속 비밀통로를 지나는 느낌이 든다. 무거운 문을 밀고 들어가 무대 앞, 두 번째 테이블에 자리잡았다. 주미는 내가 앉은 곳 바로 옆에 나란히 앉아 공연을 기다렸다.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가 싶었는데 올댓재즈의 천장이 열려있었다. 점점 까맣게 물들어가는 하늘이 좋아 연신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보았다. 천장을 가로지르는 철근에 매달린 조명이 슬금슬금 빛을 밝혔다. 

얼른 시작했으면 좋겠다.

드럼과 콘트라베이스, 피아노가 한 자리에 모였다. 드럼이 몰아치면 베이스는 잠시 쉬고 피아노는 아주 가벼운 선율을 노래했다. 그리고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있었다. 머리카락을 건드리며 얼굴을 감싸고 한순간에 흩어지는 바람은 재즈 선율에 맞춰 춤추듯 불었다.

더 오래 있었으면 좋았을 걸. 언젠가 한 번 쯤은 해밀턴에 방을 잡고 새벽 한 시 까지 이어지는 공연을 보고 싶었다. 물론 그게 오늘은 아니었지만 오늘이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그렇게, 너와 헤어지기 싫었다. 

조금 더 있었으면 좋았을 걸, 조금 더 너에 대해 알 수 있었으면 좋았을 걸. 이번 주 너를 또 만나면 조금은 이야기를 해 볼까. 어쩌면 내가 당신을 좋아하는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실제로 만나면 이런 말은 하지 않겠지. 눈치만 보다가 또 너를 집에 보내게 될 것이다. 그래도 아직, 두 번의 약속이 남아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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