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툐툐 Jul 19. 2023

정체성은 허상이다

김연수 작가의 소설 <이토록 평범한 미래>를 읽고

김연수 소설가는 소설 <이토록 평범한 미래>를 쓰기 전, 세상도 자신도 비관의 늪으로 빠진 기분이 들었고, 선배 작가의 작품을 읽으며 해답을 찾으려 애썼다고 한다. 나도 내 안에서 답을 찾지 못할 때, 주위 사람에게 답을 얻지 못할 때, 책을 뒤적거리고 일기를 쓴다. 유튜브, 드라마, 영화를 뒤적거리기도 한다. 너무 고통스러울 때는 살기 위해 생존형 글을 쓸 수밖에 없다. 사실만 기록하는 한 문장, 한 단어일지라도 말이다. 나와의 채팅을 하듯이 생각과 텍스트가 튀어나왔다가 들어갔다를 반복한다.


정갈한 문장을 좋아한다. 손에 잡히지도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을 잘 표현된 언어를 좋아한다. 그래서 오랜만에 소설책을 골랐다. 위 목적으로 책을 펼쳤으나 책 초반에 발견한 나를 울린 문구는 의외의 내용이었다.


사람들은 인생이 괴로움의 바다라고 말하지만, 우리 존재의 기본값은 행복이다. 우리 인생은 행복의 바다다. 이 바다에 파도가 일면 그 모습이 가려진다. 파도는 바다에서 비롯되지만 바다가 아니며, 결국에는 바다를 가린다. 마찬가지로 언어는 현실에서 비롯 되지만 현실이 아니며, 결국에는 현실을 가린다. 정말 행복하구나라고 말하는 그 순간부터 불안이 시작되는 경험을 한 번쯤 해 봤으리라. 행복해서 행복하다고 말했는데 왜 불안해지는가? 행복이라는 말이 실제 행복 그 자체가 아니라 이를 대신한 언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언어는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그 뜻이 달라질 수 있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이야기로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간다. 이야기의 형식은 언어다. 따라서 인간의 정체성 역시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그때그때 달라진다. 이렇듯 인간의 정체성은 허상이다. 하지만 이렇게 규정하는 것도 언어이므로 허상은 더욱 강화된다. 말로는 골백번을 더 깨달았어도 우리 인생이 이다지도 괴로운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일부러 일기를 쓰지 않을 때가 언제였는지 돌아봤다. 첫째, 생각과 감정에 압도당하고 싶지 않을 때, 둘째, 그것을 언어로 끄집어 내면 오히려 이성적인 판단을 방해받을 것 같을 때다. 김연수 소설가 또한 마음이 힘들어서 책을 찾고 글을 썼지만, 결국 나와 같은 아이러니에 부딪혔던 걸까. 힘든 마음을 달래려 언어를 찾았지만 언어로 꺼내놓고 보니 허상이어라.


최근 가장 중시하는 가치관은 ‘언행일치’다. 어여쁜 말로만 포장하고,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 되지 말아야지. 말로 내뱉지 않아도 강한 추진력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되어야지. 언어의 힘을 똑똑하게 사용할 줄 모른다면, 차라리 말을 말고 먼저 몸이 움직이는 게 낫다.


책 <이토록 평범한 미래> 44쪽에 ‘세컨드 윈드’라는 단어가 나온다. ‘운동하는 중에 고통이 줄어들고 운동을 계속하고 싶은 의욕이 생기는 상태’, ‘제2차 정상상태’라고도 한다. “운동 초반에는 호흡곤란, 가슴 통증, 두통 등 고통으로 인해 운동을 중지하고 싶은 느낌이 드는데 이 시점을 사점 (dead point)”이라고 하며, “이 시점이 지나면 고통이 줄어들고 호흡이 순조로우며 운동을 계속할 의욕이 생기는데 이 상태를 세컨드 윈드”라고 한다.


올해 3월부터 운동을 시작했다. “다이어트 시작한다!”라고 떠들고 다니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식이요법과 운동을 시작했을 뿐이었다. 몸무게와 사이즈를 기록하고 스스로 잘했다는 칭찬 한 문장만 남겼다. 이 책에서 ‘세컨드 윈드'라는 단어와 해석을 발견했을 때, 마음이 뭉클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나 보다. 저 문장이 ‘녀석, 잘하고 있었구나'라고 격려해주는 듯했다. 그래, 2023년 상반기처럼 하던대로 하고 또 하다 보면 그 다음 바람(세컨드 윈드)이 불 거야.


언어의 힘과 무력감, 행동의 중요성에 이어, 오랜만에 읽은 소설책 덕분에 얻은 깨달음을 마지막으로 적어 본다. 처음에는 ‘나는 누구인가’를 ‘아는 것’에만 집중했고, 되고 싶은 모습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다가 내 모습을 억지로 지워가며 입었던 맞지 않는 옷은 집어 던지고, 변하지 않는 축을 중심으로 살아왔다. 요새는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하여 생각이 많았다. 이제는 어느 정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알지만, 알다가도 모르겠고, 또 다른 성향이 생기는 자신을 보며 혼란스러웠다. 책 252~253쪽의 내용을 발견하고 나서는 안도했다.


말년의 푸코는 '자기 배려'를 위한 주체성에 골몰했다. 1981~1982년에 콜레주드프랑스에서 한 강의를 엮은 책에서 내가 읽은 건 살아갈 의미를 찾을 수 있는 단단한 주체성의 구조를 만들어내기 위한 그의 끈질긴 사색과 집념이다. 푸코는 강의 내내 ’내가 누구인지 묻는 근대의 주체와 방식을 뒤로하고 '내가 무엇일 수 있는지‘ 묻는 고대의 주제화 방식으로 복귀해야 한다고 말한다. 내 안에 있는 것을 발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인식론적인 세계관보다는 내 안에 없는 나를 만들어가기 위해 스스로를 변형시켜가는 실천적인 세계관으로 살아야 한다고 여긴 푸코에게 영성은 철학과 대등한 지적 체계였다. 자신을 아는 것보다 자신을 변형시키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다. 아는 것은 딜레마에 빠지게 하지만 선택하는 것은 딜레마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때문이다. 이유는 알게 한다. 하지만 이해는 행동하게 한다.


어차피 정체성은 내가 이야기로 만든 허구이다.

이미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나라는 정체성을

또 뒤집어엎느라 혼란에 빠지지 말고,

내가 방향성을 ‘선택'하고, ‘이해'해서 결국 ‘행동'해야겠다.


현대 과학에서 바라본 '자아'란, 환상에 불과한 것을 실제라고 믿을 때 생기는 체계이며, 모호한 개념이다. 단지, 경험한 감각에 대한 '이야기'들이 자아(자아상)를 이루는 것 아닐까. 의식의 존재 이유는 우리 몸을 한 곳에서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서다. 나는 복합적인 유기물일 뿐, 자아를 찾아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나자.


출처 : 알쓸인잡 9회 https://youtu.be/dDprPh24Kf4?t=55

매거진의 이전글 삶을 여행하듯, 여행을 살아보듯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