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씨앝 Dec 14. 2021

Leaving Las Vegas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Wynn에서

 "컨퍼런스 오셨어요?"

 룰렛 앞에서 칩의 높이가 줄어가는 걸 보며 한숨을 쉬고 있는 나를 향해 어느 동양인이 말을 걸었다. 그는 두 칸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다가 안타까웠는지 곁에 다가와 룰렛 게임의 원리를 설명해주었다. 그가 알려준 대로 베팅을 하고 룰렛이 도는 동안 오늘 어땠냐는 그의 질문에 나도 모르게 일정 내내 품고 있던 아쉬움을 토로해버렸다.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라는 영화 촬영지를 찾아서 밤마다 돌아다녔는데 딱 한 군데를 못 찾았어요. 제일 좋아하는 장면인데. 결국 못 찾고 내일이면 떠나야 해요. 침울한 내 표정과 달리 그는 반색하며 Sting! 을 외쳤다.


 낮보다 밤이 더 밝은 이 도시는 휘황되고 찬란한 호텔의 조명만큼 모인 사람들의 표정도 근심 없이 산뜻하다. 심지어 홈리스도 눈이 맞으면 웃는 낯으로 유쾌한 인사를 건넨다. 사막 한가운데 우두커니 세워진 도시가 세상으로부터의 고립이라는 선물을 안겨주기 때문이리라. 주말엔 LA나 샌프란시스코 등 인근 도시민들에게 일탈 같은 여행지가 되고, 비즈니스맨들에겐 한 가지 목적을 위한 집중된 공간을 제공한다. 미로 같은 호텔의 동선을 따라 밤새워 카지노를 즐기는 건 덤이다. 그가 보았듯이 물론 나는 잃고 있었고.


 몽롱하고 한정된 공간이라는 특징은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매력적일 수밖에 없어서 <오션스 시리즈>, <제이슨 본>, <나우 유 씨 미>, <라스베가스에서만 생길 수 있는 일> 등 라스베가스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가 무수하다.

 그중 단연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영화는 Sting의 우울하고 안개 낀 목소리의 OST가 돋보이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이다. 존 오브라이언의 자전적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는 음악에 백그라운드를 둔 마이클 피기스 감독의 섬세한 음악적 재능이 돋보인다. 실제로 Sting이 선물한 3곡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사운드 트랙을 마이클 피기스가 제작했으며 심지어 트럼펫과 키보드는 직접 연주했다.


 영화는 시작부터 음악이 또 하나의 주인공임을 선언하는데 암전 상태에서 축축하고 늘어지는 Sting의 Angel Eyes가 가장 먼저 등장한다. 그리고 잠시 뒤 LA, 어느 대형 마트에 휘파람을 입에 물고 스텝을 밟아가며 신바람 나게 쇼핑하는 한 남자가 있다. 앱솔루트 보드카와 꼬냑을 차례로 담는 줄 알았더니, 이미 그의 카트는 각종 술로 가득하다. 러닝타임 내내 술 냄새가 진동하는 영화는 112분 동안 우리에게 칵테일 교본 같은 수많은 술을 소개한다. 너무 많은 술의 등장에 섣불리 우려를 표했다간 그로부터 이런 말을 들을 것이다.

 "차라리 숨을 덜 쉬라고 하지!"


 " 때문에 마누라가  떠났는지, 마누라가 떠나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는 알코올 중독자 벤은 아내와 아이, 직장마저 잃고 삶의 의욕을 상실한  모든 재산을 털어 고독의 무게와도 같은 양의 술을 짊어지고 라스베가스로 향한다. 그는  술을 모조리 마시다가 라스베가스에서 죽어버릴 작정이다.


 그와 나는 카지노를 빠져나와 Wynn 호텔 안 작은 호수 옆에 딸린 바에 자리를 잡고 총 5잔의 술과 함께 대화를 나눴다. 첫 잔으로 신맛이 가득한 칵테일 잔을 부딪치면서 그로부터 Moscow mule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동글고 예쁜 동잔에 담아주는 이 칵테일을 주문하면 바 주인의 취향을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별것 아닌 소재에도 이야기를 담는 재주가 있었다.


 "컨퍼런스 오셨어요?"

 라스베가스에서 몸을 파는 여자 세라는 호텔 안의 바를 기웃거리며 낯선 남자에게 말을 건다. 그리고 허탕을 치고 나오는 길에 넋 놓고 음주운전을 하던 벤의 차에 치일 뻔하면서 둘은 처음으로 만난다. 두 번째 만남은 플라밍고 호텔 맞은편으로, 벤은 벤치에 앉아 세라의 시간을 흥정한다. 이어 카메라는 샤워를 하고 나온 세라가 다짜고짜 벤에게 펠라치오 하는 모습을 비추는데 그 전경이 애처로워 보이는 이유는 벤의 대사로 설명된다.

 "그런 거엔 관심 없어. 가지만 말아줘. 그게 내가 원하는 거야. 얘기하면서 옆에 있어 줘."


 두 번째 잔으로 나의 일행은 내게 빠뜨롱을 소개해줬다. 테킬라는 손에 잘 감기는 항아리 모양의 텀블러에 담겨 나왔다. 림을 따라 도톰한 아랫입술 모양으로 두른 소금이 매혹적이었다. 혀끝에 오일리한 감촉이 만져지는 테킬라를 비우는 동안 그는 경주마처럼 달려온 지난 삶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다 문득 어느새 나이가 들어버려 칭찬받을 곳이 없는 게 억울하다고 말하는 그의 표정이 의기소침해진 어린아이 같았다. 그런 생각이 들자 빠뜨롱의 독한 뒷맛이 살아나 손으로 더듬더듬 레몬을 찾으면서도 그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의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고 싶었다.


 이 영화를 본 누구라도 잊을 수 없는 장면은 알코올 중독자인 벤에게 세라가 은빛 힙 플라스크를 선물하는 신이다. 술 없이 살 수 없는 그에게 술병을 선물하는 이 모습을 두고 진정한 사랑을 의미한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영화는 어딘가 곪아있는 서로의 흉터를 있는 그대로 감싸 안는 사랑 이야기 임과 동시에 인생이 내 것이 아닌 사람들이 온기를 찾아 방황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출구를 찾기 어려운 라스베가스 호텔들의 꼬인 동선처럼 자신의 인생을 살아본 적이 없는 등장인물들이 갈피를 못 잡고 비틀대는 걸음을 쫓는 이야기이다. 그래서인지 영화 속 두 주인공은 자주 길을 걷고 헤매다 서로를 발견한다.


 세 번째 잔으로 우리는 라프로익 10년을 머금었다. 옅고 투명한 나무껍질 빛깔의 위스키는 글랜 캐런 잔이 아닌 빠뜨롱을 담았던 같은 모양의 텀블러에 제공됐다. 우리가 걸터앉은 자리가 공연이 시작되기 전 잠시 목을 축이는 용도로 만들어진 곳이라 잔이 다양하게 구비되어 있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그동안 달려온 동력이 무엇이었는지 물었다. 그의 열정이 어떤 결핍으로부터 기인했는지 궁금했다. 그는 속되고 노골적이면서도 어느 면에서는 소년의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게 무언가를 향한 강한 몰입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잘 생각나지 않는다. 메케한 피트감이 코를 뚫고 들어오는 바람에 이야기를 놓쳐버렸을 수도, 아니면 그가 대답을 묘하게 회피했을 수도 있다.


 벤이 취해서 등장할 때면 착잡한 관객의 마음은 아랑곳 않고 마이클 피기스의 트럼펫 소리는 더욱 경쾌하게 터져 나온다. 세라의 소파에 널브러진 벤은 부정확한 발음으로 말한다.

 "나는 알코올 중독자이고 당신은 창녀야. 그런 점에서 나는 편한 사람이란 걸 알아둬. 내가 무관심하거나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당신의 판단을 믿고 존중하기 때문이야."

 영화는 시종일관 서로의 환부를 아무런 보호막 없이 열어두고 맞대는 쓰라림을 응시한다. 제아무리 짙은 사랑도 시간이 흐르면 각자 평소의 습관을 찾기 마련인데 이 때, 석양을 배경으로 쓸쓸함이 더해진 Angel eyes가 한 번 더 재생되며 벤은 다시 술에 자신을 담글 때가, 세라는 낯선 이에게 몸을 내덜질 때가 되었다는 걸 알린다.


 네 번째 잔으로 나는 초콜릿 향이 나는 칵테일을 주문했다. 가느다란 스템 위에 역삼각 모양으로 아슬아슬하게 세워진 보울을 보자 아름다운 건 모두 불편하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와 나는 이 맛이 베일리스에서 왔는지, 깔루아의 것인지 내기했지만 결론은 그냥 초콜릿 시럽이었다. 달큼한 맛에 취하는 줄도 모르고 술술 넘기다가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레드 와인을 마지막으로 마시고 일어섰다. 돌아오는 내내 어쨌든 멋진 사람이 되고 싶었다는 그의 말이 계속 맴돌았다.

 “오늘 내 얘기가 재밌었다면, 그건 다 내가 만났던 선배님들 덕이예요.”

 그의 지난 여정에는 운 좋게 빛이 바래지 않는 가치를 새겨주는 어른들이 있었고, 그들의 격려를 받아 한계를 뛰어넘는 경험을 쌓아가는 게 즐거웠지만, 한쪽 팔만 크게 자란 어른이 된 것 같아 이제 와 약간은 허탈한 마음이 든다며 앙앙 우는 듯한 그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 뺨을 감싸주고 싶었다.


 세라는 영화 내내 누군가와 인터뷰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이야기를 계속 들어보고 싶었어요."

 사랑은 그이의 말에 귀 기울이고, 그의 고단한 인생을 다독여주고 싶은 욕구를 깨닫는 경험이다. 살면서 만나는 어떤 허기짐은 이 애틋한 관심을 실현하며 자연스레 해소된다. 이제 벤은 없고, 세라는 다시 홀로 서서 출구를 찾아 걸음을 옮긴다.

매거진의 이전글 요세미티 국립공원에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