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터 비에리의 <자기 결정>을 읽고
자기 결정이라는 제목은 뭐랄까,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사회가 정한 법과 규칙, 그리고 암묵적으로 따르게 되는 관념과 관습 속에서 나이가 들수록 ‘자기 결정’이라는 말은 딴세상 언어처럼 느껴진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곳에서 나의 시간을 내주고, 그 대가로 누군가가 정한 액수의 돈을 받으며 살아가는 일상 속에서는 그것이 일탈의 입구처럼 보이기도 한다. 혹은 사업을 하는 입장에서 모든 책임을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자기 결정의 무게 때문일지도 모른다. 평범해 보이는 제목이 이렇게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이유다.
책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존엄성과 행복의 측면에서 자기 결정을 원하는 것은 결국 모두의 바람이라고. 그리고 두 가지 관점을 제시한다. ‘외부의 무언가에 직접적으로 휘둘리지 않는 자기 결정성’, 그리고 ‘내 사고가 외부 세계의 인과에 그저 끌려다니지 않는 자기 결정성’. 하지만 나는 이 대목부터 선뜻 동의하기 어려웠다.
자기 결정이라는 말은 자연스럽게 자유의지를 떠올리게 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는 있는가? 이 질문이 해소되지 않으면 이후의 주장에 온전히 몰입하기 힘들다.
여기서 과학이 개입한다. 과학을 깊이 아는 전문가는 아니지만, 배운 바로는 크게 고전역학과 양자역학으로 나눠 설명할 수 있다. 고전역학의 관점에서는 모든 변수를 알 수 있다면 몇 초 뒤, 며칠 뒤의 사건까지도 예측이 가능하다. 공을 던질 때 던진 힘과 공기의 흐름을 안다면 궤적을 계산할 수 있듯이 말이다. 즉, 미래는 이미 결정되어 있고, 우리가 모르는 것은 단지 변수가 너무 많기 때문일 뿐이다. 라플라스의 악마라면 모든 변수를 알 수 있고, 그렇다면 자유의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양자역학은 다르다. 고전역학의 결정론에서 벗어나 있지만, 자유의지를 옹호하지도 않는다. 모든 것이 확률적으로 일어날 뿐이며, 무작위성은 자유의지와는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런 과학적 결론 앞에서 무력감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다고 본다. 테드 창의 <숨>에 나오는 단편집에서처럼 모든 것이 이미 정해져 있더라도, 우리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또 하나의 결정이자 삶의 방식이 될 수 있으니까.
그래서 나는 페터 비에리의 논지를 약간 비틀어 오독하고 싶었다. 그가 말한 자기 결정의 두 가지 측면 중 ‘내적 자기결정성’을 나는 ‘내적 합리화’로 읽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모래 같은 존재라 해도,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자유의지가 있다고 믿으며 자기 결정을 하고 있다고 스스로 합리화하면 되는 것이다.
삶에 있어 지금 나는 가장 평화롭다. 대기업에 다니던 시절의 안정성은 사라졌지만, 1년 365일을 내가 결정한다는 ‘믿음(혹은 환상)’이 내 삶을 풍요롭게 한다. 쇠렌 키르케고르는 무한한 자유 앞에서 인간이 현기증을 느낀다고 했지만, 나는 아직 그렇지 않다. 만족스럽다. 책이 말하는 바가 사실이든 아니든, 자기 결정적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믿음, 혹은 환상과 함께 앞으로도 걸어가려 한다.
퇴사가 고민이라면, 이 책부터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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