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기를 준비하며...
내 어린 시절 꿈은 외교관이었다. 왜 그랬는지는 나도 모른다. 단순히 해외를 돌아다니며 일을 하고, 많은 외국인 친구들을 만나고, 낯선 곳에서 아침 해를 본다는 그런 낭만적인 로망이 나를 가득 채웠을지도 모른다. 그랬다. 나는 그랬었다.
그런데 고등학교 2학년 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죽었을 때 사람들이 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른다면, 그건 너무 슬프지 않을까? 내가 길을 지나다니면 그래도 "아! 저 사람 누구야" 정도는 이야기해야 이 세상과 이별을 할 때도 참 재밌게 살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새로운 꿈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것은 배우였다. 외교관에서 배우로 바뀌다니 참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런데, 그때 그 꿈에 대한 열망이 너무 강해서 그 잘하던 공부를 접고 한양대 연극영화과로 진학했다. 그럼에도 신기한 건 배우를 하려고 해도 할리우드에서 하고 싶었다. 세계를 누비는 배우. 역마살이 가시진 않았었던 것 같다.
대학교에 들어가 내 생각과 열정과는 너무 다른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채 그렇게 휴학을 하고, 3개월 배운 기타와 배낭만 들고 영국, 아일랜드로 혼자 떠났다. 정말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의 영향으로 피아노, 플루트, 드럼, 하모니카 등등 많은 악기를 배웠고, 또한 내 유년시절의 모든 마음을 지배했던 팝송들로 인해 음악은 내 베스트 프랜드와 같은 존재였는데 그런 음악적인 소양들이 쌓여 무한한 자신감으로 나를 외국으로 내 몰았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정말 딱 수첩 1페이지짜리 여행 계획을 가지고 그냥 무작정 떠났다.
EBS 테마 기행이라는 프로그램에서 가수 하림 씨가 나와서 아일랜드를 떠돌며 음악적인 교류를 하는 것을 보고 나도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 그냥 떠났다.
어린시절부터 자연스럽게 하던 영어와 외국친구들과의 일상들이 해외로 홀로 나간다는 것에 대해서 큰 두려움을 가지진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난 한 달 반 정도의 기간을 홀로 떠돌며 길거리 공연을 하고, 라이브 바에서 가수 일 도 하면서 낭만을 누렸다. 자기네 집에서 자고 가라는 분도 계셨고, 라이브 바에서 노래를 다 마치고 나면 밥과 술을 사는 분도 많이 계셨다.
솔직히 말하면 굉장히 외롭기도 했었다. 지금은 스마트폰이 보급되어 어디서나 카톡, 페이스북, 트위터를 통해 한국에 있는 친구들 가족과 소통이 되지만, 저 당시엔 폴더폰밖에 없었던 터라 문자 한 통에 몇백 원씩 하는 것을 도저히 아까워서 보낼 수 가 없었다. 어머니가 건강하게 잘 있냐고 물어볼 땐 꼭 문자를 꽉꽉 채워서 아주 즐겁게 보내고 있다고 거짓말을 조금 보태 보냈던 기억이 난다.
워낙 동양인 자체가 없는 나라고, 거기에다 설사 한국사람을 본다고 해도 내가 혼혈인처럼 생겨서 말도 안 걸어왔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건 내가 그곳에 가면 그곳의 문화를 전부 누려야 한다는 주의였기에, 한국인을 만나도 영어로 대화했다. 물론 외국인인척 하고.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웃기다.
그렇게 나에게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그 여행은 얼마나 나에게 인상 깊었는지, 어떤 곳에 나에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했던 순간을 적으시오라는 문항이 나오면 항상 아일랜드를 여행했던 그때를 적어내곤 했다. 그렇게 내 꿈은 시작되었던 것 같다.
후에 더 언급을 하겠지만, 김건모, 신승훈, 홍경민, 클론, 박미경 등 국민가수를 만들었던 우리나라의 최고 프로듀서였던 김창환 프로듀서님 밑에서 가수 데뷔를 앞두고 회사와의 트러블로 외국에서 음악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아무 미련 없이 회사를 떠났을 때, 나에게 그런 과감한 결단을 내릴 수 있게 해줬던 것은, 내 스물한 살 너무나 마음 깊숙이 박혀버린 아일랜드에서의 기억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회사를 나오고 나서 미국으로 바로 넘어갔다. 그곳에서 처음 노래를 할 때 너무 떨어서 목소리가 다 안 나올 지경이었다. 어디서든 노래하면 떨지 않고 무대를 즐기던 나는 없었다. 내가 하는 음악인 재즈, 블루스, 팝의 나라 미국에서, 그들의 음악으로 그들에게 내 음악이 어떻게 들릴까 생각하니 오디션장에 선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 무대를 그렇게 쫄딱 망쳤다. 목이 너무 타서 침이 말라 소리가 잘 안 나왔다.
아무것도 못 보여준 내가 너무 바보 같아서, 다음번에는 그냥 나가서 나 혼자 노래한다고 생각하고 하고 싶은 노래 다 하고 후회 없이 들어오자고 하고 거리로 나가 앰프를 켜고 밤에 노래를 시작했다.
그런데 정말 그렇게 마음먹고 나가서 노래를 시작하니 정말 정상 컨디션으로 돌아왔다. 너무나 많은 분들이 노래를 들어주셨는데, 돈도 1시간 만에 수십 달러나 될 정도로 엄청 많이 벌었다. 그런데 돈보다 중요했던 건 사람들의 반응이었는데
"와우! 네가 여기 거리에 있는 사람들 다 죽이고 있어. 장난 아니야"
이렇게 말하며 5달러를 넣어주시는 분도 계셨고, 어떤 미국인 흑인 여성분들은 그냥 지나가다가 다시 뒷걸음질로 돌아와서 한참을 보시더니
"너 노래 진짜 진짜 죽인다"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돈을 넣어주시기도 했다. 그들의 나라에서 그들의 음악으로 그들에게 인정받는다는 것. 나에게는 그것보다 짜릿한 것이 있을 수 없었다. 정말 최고로 행복한 순간이었다.
그렇게 내 뮤직 스토리는 시작되었다. 몇 달 동안 미국에서 그렇게 공연하고 지금 내가 떠나려고 하는 프로젝트를 기획하기 시작하였다. 작년 2월 다 마치지 못한 학업문제로 한국에 돌아와 학교를 다니며 그것을 구체화하기 시작했고, 올해 8월 31일 떠나는 비행기표를 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