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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방학

by 김태민

2001년. 중학교 1학년을 마치고 맞이한 겨울방학을 외삼촌댁에서 보냈다. 부모님은 교회운영을 그만두면서 정리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자초지종을 알고 있었던 외삼촌과 외숙모는 나를 따뜻하게 맞이해 줬다. 웃으면서 꼭 안아주던 외할머니의 모습이 여전히 생생하다.


어른들끼리 이야기를 마치고 올라가기 전에 엄마는 나를 불렀다. 내 손에 5만 원을 쥐어주면서 사촌들이랑 맛있는 음식을 사 먹으라고 말했다. 5만 원은 거금이었다. 당시 엄마의 하루일당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 돈을 쓰지 않으려고 배낭 깊은 곳 주머니에 세 번 접어 넣어뒀다.


다시 올라가면 엄마에게 꼭 돌려주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첫날 외삼촌과 외숙모는 나를 데리고 백화점에 갔다. 난생처음 비싼 오리털패딩을 선물 받았다. 택에 붙은 40만 원이라는 가격을 보고 놀랐다. 살면서 그렇게 비싼 옷을 본 적이 없던 나는 0의 개수를 몇 번이나 다시 확인했다.


외삼촌은 정겨운 대구사투리로 올 겨울이 유난히 춥다면서 따뜻하게 입고 다니라는 말을 덧붙였다. 초등학생 때부터 겨울 내내 입고 다녔던 솜잠바는 숨이 다 죽어서 납작해졌다. 그 모습이 두 분의 눈에 밟혔던 것 같다. 저녁식사로 갈비를 먹고 사촌들과 영화를 보러 갔다.


안양을 벗어나서 처음 본 영화는 해리포터였다. 영화가 끝나고 대구의 명물인 빨간 어묵도 먹었다. 매운 음식을 못 먹는 나는 처음 접한 뜨거운 맛에 혼쭐이 났다. 그 모습을 보면서 사촌누나들이 웃었고 나도 같이 웃었다. 늦은 밤 잠자리 누웠을 때 우리 집을 떠올렸다. 부모님이 생각났다.


맛있는 저녁을 먹고 영화도 보고 재미있게 하루를 보냈는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초등학교 6학년때부터 집안 사정이 안 좋아졌다. 집에 부담이 되지 않는 것 만이 최선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림을 제법 잘 그렸던 나는 미술로 유명한 사립중학교에 지원해 보라는 선생님들의 권유를 받았다.


학비는 부모님이 감당하기 너무나 부담스러운 금액이었다. 나는 집에서 버스로 스무 정거장 떨어져 있는 공립중학교를 선택했다. 당시의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었다. 그림 그리고 싶지 않냐는 아빠의 물음에도 나는 괜찮다고 대답했다.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면서 몰래 종이비행기를 접듯이 꿈을 접었다.


미련이나 아쉬운 마음은 멀리 날려 보냈다. 그 시절의 우리 가족은 서로를 위해 보이지 않는 양보와 배려를 하고 살았다. 대구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따뜻한 옷을 입고 지낼 때면 부모님 생각이 났다. 외삼촌댁은 내내 따뜻했다. 땀이 날 만큼 후끈했고 바닥도 뜨끈했다.


난방비를 아끼려고 안방에만 보일러를 때는 우리 집과는 정반대였다. 거실 소파에 앉아있으면 하얀 입김이 나왔다. 전기장판과 두꺼운 이불로 겨울을 버티는 부모님 모습이 생각났다. 미안한 마음이 좀처럼 가시지 않을 때는 집에 안부전화를 했다. 목소리를 들으면 안 좋은 마음이 좀 나아졌다.


외삼촌댁에서 보낸 시간은 편안했다. 방학 기간 동안 친구들은 만날 수 없었지만 괜찮았다. 부모님과 자주 통화했다. 옷은 따뜻하게 입고 다니는지 밥은 잘 먹는지 걱정이 많았다. 대구에서 보낸 한 달간 키기 3cm나 자랐다. 2001년의 겨울방학은 편안하고 평온했다.


어디에도 기댈 곳 없는 몸과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쉴 수 있었다. 그 시간이 없었다면 고통스러운 사춘기를 맞이했을 것이다. 그때를 떠올리면 두 분께 감사한 마음이 든다. 친척들과 가깝게 지낸 시간은 안타깝지만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우리 집은 명절이니 경조사에 거의 얼굴을 내비치지 못했다.


거의 몇 년에 한 번 꼴로 만나게 되다 보니 서먹서먹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쭈뼛거리며 인사를 건네면 사투리와 함께 환한 미소가 돌아왔다. 단절된 시간들이 못내 아쉬웠지만 혈연은 흔한 인연보다 훨씬 끈끈했다. 살아오는 동안 정말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


관심과 걱정 그리고 격려를 받으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친척들의 사랑과 응원을 받으면서 살았다는 것을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내가 넘어지지 않도록 부모님은 나를 붙들어줬다. 소중한 친구들과 좋은 인연들 역시 큰 힘이 됐다.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 세상에서 부모님 두 분은 삶의 끈을 놓치지 않았다.


위기를 거치면서 살아남은 우리 가족의 삶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남들처럼 못살아도 좋다. 남들보다 부족해도 괜찮다. 어떤 모습이든 삶은 의미와 가치가 있다. 살면서 만난 모든 사람들에게 고맙다. 그리고 나의 소중한 가족을 그때나 지금이나 늘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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