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처럼 단풍이 들었다. 이틀 만에 가을에서 늦가을로 넘어왔다. 올해는 가을이 유난히 짧다. 복자기나무 아래 낙엽이 떨어져 있다. 매일 보던 풍경이 이틀 만에 크게 달라졌다. 명학동을 내려다보는 관모봉은 따뜻한 색감의 가을옷을 꺼내 입었다. 환한 가을볕은 늦은 오후가 되면 빠르게 사그라든다.
해질 무렵 부는 찬바람에 겨울의 숨결이 깃들어있다. 공원을 산책하는 사람들은 패딩과 코트를 입었다. 10월도 끝이다. 곧 11월이다. 이제 겨울이다. 연말이 얼마 남지 않았다. 성실하게 흐르는 시간은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다. 계절의 변곡점마다 착실하게 존재감을 드러낸다.
매년 이맘때면 기다란 빗자루를 들고 은행나뭇잎이 쌓여있는 뒷마당을 쓸었다. 여름과 가을의 흔적이 남아있는 낙엽을 치우면서 어지러운 감정이나 지저분한 마음을 함께 정리했다. 한 해의 끝을 앞두고 드는 감정은 아쉬움보다는 감사함이다. 잘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잘 살아남았다.
살아있다는 사실에 의미를 부여한다. 포기하지 않고 살아온 매일매일이 기적이었다. 좋은 날도 있고 슬픈 날도 있었다. 매년 그랬다. 일희일비하면서 걱정하고 후회하면서 세월을 흘려보냈다. 지금은 그냥 있는 그대로 산다. 잃은 것을 세지 않고 내 것이 아닌 것에 눈길을 주지 않는다.
그냥 살아도 삶은 삶이다. 계절은 수식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봄은 그냥 봄이다. 아름다운 날은 봄날에 한정되지 않는다. 여름은 찬란하고 겨울은 고요하다. 봄이 아니라도 아름답다. 삶도 마찬가지다. 모든 삶은 의미와 가치가 있다. 비교를 멈추는 순간 인간은 누구나 곧바로 행복을 만나게 된다.
비교하는 일을 그만두게 되면서 뒤늦게 어른이 된 것 같다. 한 때 네트를 사이에 두고 랠리를 벌이는 셔틀콕처럼 포인트를 내주고 따라잡는 전쟁 같은 날들을 보냈다. 치열한 접전이 끝나고 나면 탈력감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사냥개처럼 따라붙는 불안과 걱정이 싫어서 바쁘게 살았던 시절은 괴로웠다.
역설적이지만 비울수록 삶은 더 충만해지는 것 같다. 가을나무는 가득 매달고 있는 고운 이파리를 남김없이 버린다. 봄날의 기억과 여름날을 추억도 결국 한 때다. 담담한 자세로 겨울을 나면서 봄을 기다린다. 미련으로 변한 기억과 어지럽게 물든 추억 앞에서 결정을 망설이지 않는다.
지금은 한결 여유로워졌다. 생활은 빠듯하고 환경은 초라하지만 마음이 좀 가벼워졌다. 화려한 색감의 단풍을 털어낸 겨울나무는 앙상하지만 가볍다. 지나간 계절에 얽매이지 않고 다가올 새로운 봄을 기다린다. 낙엽을 쓸듯이 마음속 깊은 곳에 켜켜이 쌓여있는 오래된 과거를 정리한다.
세월은 낡아가면서 점점 미련으로 변한다. 미련은 주기적으로 털어내야 하는 먼지 같은 감정이다. 덕지덕지 붙어있는 이름표들에 시선이 닿았다. 더는 의미 없는 얼굴과 장면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간다. 한데 모아서 내다 버린다. 텅 빈 내면의 방을 들여다보면 개운한 기분이 든다.
가을의 끝에서 일 년간 있었던 일들을 돌아본다. 겨울은 비우고 정리하는 계절이다. 따뜻한 온기가 그리워지는 시기다. 기억 속에서 좋았던 일만 골라내서 오래 간직하고 싶지만 마음은 뜻 대로 되지 않는다. 색온도차가 나는 추억과 기억에 같은 색 물감을 칠했다. 내면을 비우는 것처럼 적당한 합리화도 생존본능이다.
가을맞이 청소를 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월동준비를 해야 할 때가 됐다. 온 집안의 창문을 열고 청소를 했다. 이불을 빨아서 옥상에 널었다. 겨울옷을 꺼내서 햇볕을 쬐었다. 코트는 세탁소에 맡겨야겠다. 걸레질을 하다 보니 이마에 땀이 맺혔다. 창문 너머 불어온 바람의 투명한 손길이 고단함을 닦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