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한 점 없는 날이다. 꼭 가을 같은 날씨다. 시야에 들어오는 하늘은 하늘색 크레파스와 꼭 닮은 선명한 색감을 품고 있다. 아직 초복도 안 지났는데 추석이 떠올랐다. 새하얀 햇살에 물든 문예로 여기저기에 하얀빛웅덩이가 생겼다. 느긋하게 걷다 보니 기분이 상쾌해졌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반가운 토요일이다.
카페에 가서 글을 쓸 생각이었는데 행선지를 바꿔서 만안도서관으로 향했다. 나무와 수풀이 우거진 도서관 후문을 좋아하지만 오늘은 하늘을 좀 더 가까이 보고 싶어서 정문을 택했다. 안양6동과 8동은 완만한 언덕을 품고 있는 동네다. 산자락 아래 자리 잡은 만안도서관은 언덕 중턱에 있다. 지대가 제법 높은 편이다.
도서관 정문에서 등을 돌리고 앞을 바라보면 안양시가 한눈에 다 들어온다. 오늘은 멀리 관악산과 과천시까지 보인다. 어제까지만 해도 먹구름이 가득했는데 거짓말처럼 날이 좋아졌다. 책 읽기 정말 좋은 날씨다. 2층 관외대출실로 올라가서 이번 달 신간을 살펴보다 마음에 드는 책을 두 권 골랐다.
추리소설도 몇 권 빌렸다. 자리에 앉아서 요네자와 호노부가 쓴 <가연물> 마지막 챕터를 읽었다. 중반부까지 읽고 반납해 버렸는데 독서감상문을 쓰려고 완독 했다. 다 읽은 책을 서고에 꽂고 자리로 돌아와서 조예은의 신간을 펼쳤다. 두 시간쯤 독서를 하다 잠시 쉬려고 대출실 밖으로 나왔다. 물을 한 잔 마시고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가방에서 야채크래커 한 봉지를 꺼내 먹었다. 도서관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모서리에 꺾은 창이 달려있다. 대출실로 올라가다 창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나올 때만 해도 없었던 하얀 뭉게구름이 보였다. 매년 여름이면 찾아보는 영화 <섬머워즈>에 나오는 장면이 떠올랐다. 후문 근처 송전탑 위에 커다간 솜사탕 같은 구름이 걸려있었다.
손 끝이 닿으면 체온에 귀퉁이가 사르르 녹을 것 같았다. 그림으로 그리고 싶어서 사진 몇 장을 찍었다. 그때 송전탑 끄트머리에 달린 풍향계가 눈에 들어왔다. 노란색 플라스틱 숟가락 네 개를 연결해 놓은 것 같았다. 투명한 바람의 손길이 풍향계를 건드렸다. 부드럽게 회전하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는데 오래된 기억이 떠올랐다.
수수깡 끝에 핀을 꽂아서 만든 바람개비를 가지고 놀던 어린 시절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메가트리아가 덕천마을로 불리던 시절의 기억이다. 지금은 산책로가 들어선 안양천 주변은 어린아이 무릎이 잠길 만큼 수풀이 무성했다. 가을이 오면 친구들과 나는 바람개비를 손에 들고 신나게 뛰어놀았다. 풀숲에서 잠자리도 잡았다.
막상 애써 잡은 잠자리는 매번 풀어줬다. 두 마리를 마주 보게 해서 싸움을 붙이려고 했지만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곤충채집을 그만두고 바람개비를 들고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그러다 집으로 돌아갈 때쯤 다 같이 천변 모래톱에 바람개비를 꽂았다. 바람이 불면 강물 표면에 하얀 물비늘이 유리구슬처럼 반짝였다.
색종이로 만든 바람개비가 도는 모습을 보면서 부드러운 바람의 손길을 상상했다. 세월은 함께 놀았던 친구들의 얼굴이나 이름을 씻어냈지만 기억은 여전히 온기를 품고 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 언저리가 따스해지는 순간들. 잘게 조각나서 형체를 알아볼 수는 없지만 하나씩 이어다 붙이면 기억은 추억이 된다.
좋은 날도 슬픈 날도 모두 삶이 됐다. 계절이 흐르고 시간이 지나면 상처 위에 새살이 돋는다. 흉터가 선명하게 남았지만 통증은 사라졌다. 깨끗이 나았다기보다는 나이가 들면서 견딜만해졌다. 뒤돌아보면 강변을 뒤덮은 억새 같은 세월이 늘어서있다. 그때는 힘들었지만 지금은 돌아볼만한 여유가 생겼다.
오랜만에 만난 지난 시절이 반가웠다. 언젠가 다른 곳에서 송전탑 위의 풍향계를 다시 보게 된다면 그때는 지금 이 순간을 떠올리게 될 것 같다. 그때의 나는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먼 미래를 상상하고 과거의 기억을 들여다보다 현재로 돌아온다. 강 하구 기수역에서 만나는 민물과 바닷물처럼 삶은 교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