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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햇살 속에서

by 김태민

친구를 만나서 밥을 먹고 명학공원을 함께 걸었다. 날은 더웠지만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산책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분수가 보이는 광장 벤치에 잠시 앉았다. 시원하게 솟구치는 물줄기를 구경했다. 아이들은 망설임 없이 분수대로 뛰어들었다. 맑은 웃음소리와 투명한 물방울이 부딪히면서 눈부시게 반짝였다.


구름 한 점 없는 여름하늘을 향해 솟아오르는 분수는 꼭 영롱한 수정 같았다. 동네 금은방 진열장에 놓여있었던 커다란 수정이 떠올랐다. 잘게 부서진 물방울은 햇살과 만나 작은 무지개를 만들었다. 여름다운 풍경이었다. 고개를 들어 바라본 수리산의 산마루는 싱그러운 푸른빛으로 가득했다. 울창한 숲을 두르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양산을 쓴 할머니들이 느린 걸음으로 공원을 돌면서 한담을 주고받았다. 오늘 볕이 꼭 가을 같다는 말이 귀에 들어왔다. 따가운 햇살은 어제보다 기세가 한풀 꺾였다. 물빛을 품은 여름하늘은 그대로였지만 햇살은 가을볕에 가까워 보였다. 빨래 말리기 좋은 날씨다. 핸드폰을 꺼내서 날씨앱을 눌렀다. 습도는 55%다. 살랑이는 실바람이 볼을 쓸고 지나갔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지중해의 휴양지가 꼭 이런 날씨일까? 스페인이나 그리스는 햇볕을 관광상품으로 홍보한다는 이야기를 책에서 본 적 있다. 초여름에서 한여름으로 넘어가는 시기의 햇살은 삶을 화사하게 물들인다. 88 올림픽 기간에 한국을 찾은 유럽인들이 화창한 날씨에 매료돼서 수시로 일광욕을 즐겼다는 일화가 떠올랐다.


남은 여름이 전부 오늘 같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늘 그랬듯이 폭염이 이어지겠지만 바람은 아이처럼 솔직하다. 습도만 낮으면 여름도 지낼만할 텐데 날씨는 사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그래도 적응하고 지내다 보면 어느새 가을이다. 자연 앞에서 인간은 원망 대신에 인정을 선택한다. 변화를 천천히 받아들이게 된다.


사는 것도 비슷하다. 기억은 아름다운 추억을 동반하지만 망각은 그 자체로 축복이다. 힘든 순간은 시간이 지나면 점점 희미해진다.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은 잊고 납득하기 힘든 문제는 지운다. 결국 지나고 나면 좋은 것만 남는다. 예고 없이 찾아오는 소나기나 그칠 줄 모르는 장맛비를 떠올리면서 여름을 미워하는 사람은 없다.


오늘은 좋은 날이다. 실내와 야외를 가릴 것 없이 날씨가 좋으면 다 좋다. 화창한 날은 집에서 낮잠만 자도 행복하다. 약속이 있으면 설레고 만날 사람이 없어도 아쉽지 않다. 여유롭게 공원만 걸어도 들뜨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행복의 팔 할은 날씨다. 며칠간 무더운 날씨가 이어지다 찾아온 가을기운이 반갑다. 여름 몰래 가을이 내민 손을 잡은 기분이다.


계절이 변하면 햇살도 달라진다. 추분이 지나면 햇살은 차츰 노란빛을 띤다. 낮이 짧아지면서 새하얀 여름볕이 누그러진다. 가을걷이가 시작되는 들판을 부드럽게 물들이는 햇빛은 선명한 금색이다. 여름날의 땡볕은 눈이 부실만큼 희다. 투명한 봄볕은 따뜻하지만 금세 살갗이 탈만큼 쨍하다. 겨울볕은 물처럼 맑다. 고운 손길로 바짝 마른 나뭇가지와 언 땅에 온기를 수혈한다.


오후의 햇살은 비 온 뒤 노을에 물든 하늘 같은 색이다. 볕이 닿은 곳마다 명도와 채도가 올라간다. 공원 너머 보이는 낡은 빌라의 회벽이 노랗게 변했다. 페인트칠을 새로 한 것처럼 보였다. 옹기종기 붙어있는 다세대주택들은 잃어버린 색깔을 되찾았다. 오래된 벽돌담장 위로 따뜻한 온기가 감돈다. 세월이 앗아간 시간을 햇살이 되돌려놓은 것 같았다.


20년 넘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우리 동네는 참 많이 변했다. 잠업시험소가 이전하면서 버려졌던 공터는 명학공원이 됐다. 눈앞에 잊고 지냈던 기억 속의 풍경이 펼쳐졌다. 중학생 시절 처음 본 안양 8동의 옛 모습이 떠올랐다. 과거와 현재가 한데 포개지면서 데칼코마니를 만들어냈다. 둘의 색감은 서로 다르지만 색온도는 같다. 살아온 날도 살아갈 날도 전부 햇살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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