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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야간세탁소

by 김태민

어쩌다 한 번씩 늦은 밤에 무인세탁소를 찾는다. 집에 멀쩡한 세탁기를 놔두고 굳이 가는 이유는 따로 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옷가지를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번잡한 마음과 복잡한 머리를 비우러 무인세탁소에 간다. 기다리는 동안 책을 꺼내 읽거나 어둠이 내린 바깥 풍경을 응시한다.


밤의 무인세탁소는 에드워드 호퍼가 그린 나이트호크를 닮았다. 네온사인과 밝은 조명이 만든 생활감 없는 건조한 온기가 감도는 공간이다. 밝지만 고독하고 조용하지만 삭막하다. 어둠 속에서 환하게 빛나는 간판은 손님을 기다리지만 막상 문을 열고 들어가면 반기는 느낌은 없다. 들어오라는 뜻인지 얼른 나가라는 의미인지 이해하기 힘든 손짓을 한다.


볼일 보고 얼른 돌아가라는 냉정함과 어두운 밤길을 비추는 선의가 공존하는 묘한 공간. 24시간 운영하는 무인세탁소의 정체성은 마치 뒤엉킨 빨랫감 같다. 세탁바구니에 넣어둔 하얀 티셔츠 몇 벌을 가방에 담아서 밖으로 나간다. 가볍게 읽을 만한 책도 한 권 챙긴다. 가로등 불빛을 따라 걷다 보면 5분 만에 도착한다.


동네에 24시간 운영하는 세탁소가 여러 군데 있다. 그날 기분에 따라 아무 데나 간다. 집에서 제일 가까운 곳으로 갈 때도 있고 일부러 좀 걸으려고 멀리 갈 때도 있다. 자정을 넘어서 가면 손님은 거의 없다. 안양 6동에 있는 셀프빨래방은 무인카페와 붙어있다. 세탁완료를 기다리면서 라테와 머핀을 먹는 사람을 본 적 있는데 신기했다.


어디를 가든 루틴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세탁코스를 설정하고 가까운 자리에 앉아서 옷가지가 돌아가는 모습을 구경한다. 티셔츠는 새콤달콤 여러 개를 한 입에 넣은 것처럼 엉망으로 뒤엉킨 채 빙빙 돈다. 줄무늬 장목양말 두 켤레가 단조로운 하얀 티셔츠 무더기에 색감을 흘려 넣었다. 세제거품이 일어나면서 물은 금세 불투명한 회색으로 변했다.


업소용 대형드럼세탁기가 내뱉는 소음은 덩치 큰 레트리버가 코 고는 소리와 닮았다. 빨랫감이 시계방향과 역방향으로 번갈아 도는 모습을 앉아서 가만히 본다. 시간은 무의미하게 흐른다. 애써 붙잡으려고 하지 않는다. 단조로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매장 안에 있는 활자를 찾아 눈으로 좇는다.


안내문이나 사용설명서 할인혜택을 담은 종이들이 벽면에 붙어있다. 무의미한 단어들을 슬쩍 훑고 곧바로 시야에서 지운다. 시계에서 눈을 떼면 시간은 멋대로 간격을 벌리고 저만치 도망간다. 지켜보는 사람 없는 새벽은 맘대로 속도를 조절한다. 세탁이 끝나면 건조를 시작한다.


열풍을 맞으며 세탁조 안에서 너울거리는 옷들이 서커스를 하는 것 같았다. 빠른 속도로 공중그네를 번갈아 타는 유연한 곡예사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건조까지 끝난 빨래를 가방에 담아서 집으로 간다. 짧은 외출을 마치고 돌아와서 침대에 누우면 평소보다 더 깊게 잠든다. 이유는 알 수 없다.


추측해 보자면 나도 모르는 사이 내면에 달라붙은 걱정이나 불안이 씻겨나가서 그런 것 같다. 늦은 밤 무인세탁소에 가서 무의식적으로 마음을 세탁하고 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땀냄새가 밴 티셔츠 뭉치와 함께 때 묻은 마음을 꺼내서 같이 빨았다. 깨끗하게 입고 지내다 때가 되면 다시 밤의 세탁소를 찾아야겠다.


빨랫감처럼 수북하게 쌓인 잡념을 비워내면 삶이 한결 가벼워진다. 용량이 초과되지 않도록 자주 정리한다. 어지러운 이름표를 달고 있는 기억의 부스러기를 모아서 버린다. 잔뜩 뒤엉켜있는 감정의 결이 가지런해지도록 빗질도 한다. 욕망인지 소망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바람과 복잡한 마음이 내면에 가득 차면 세탁소에 간다. 삶은 채우는 것보다 비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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