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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환기

by 김태민

모처럼 날이 맑다. 이틀간 비가 오고 그치기를 반복하면서 하늘이 쭉 잿빛이었는데 오늘은 푸르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다. 눈부시게 하얀 햇살이 까맣게 젖은 땅의 색깔을 연하게 바꿔놓고 있다. 집안일하기 좋은 날이다. 세탁기와 청소기를 돌리고 걸레질까지 끝마쳤다. 옥상에 빨래를 널었다. 페트병은 박스에 담아 골목 밖에 내놨다.


돌아와서 온 집안의 창문을 크게 활짝 열었다. 장마철 습기와 눅눅한 냄새를 날려 보내야겠다. 선풍기 세기를 강풍에 맞추고 회전을 눌렀다. 인센스 스틱을 꺼내서 식탁 위에 올려놓고 불을 붙였다. 은은하게 감도는 머스크 향이 마음에 든다. 40년 된 낡고 오래된 연립주택은 여름에는 찜통 같고 겨울에는 냉장고 같다. 습기를 막으려고 창문을 닫으면 뜬내가 난다.


큰 비가 내리고 나면 천장에 달라붙은 검은곰팡이는 과감하게 영토를 확장했다. 하얀 창호지 위를 물들이는 먹물처럼 빠르게 번졌다. 곰팡이는 늘 우리 가족을 따라다녔다. 이사를 가도 따돌릴 수 없었다.

볕이 드는 자리를 피해 자기들만의 왕국을 건설했다. 벽을 긁어내고 벽지를 덧바르는 노력은 무색해졌다. 여름 햇살 속에서 당당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곰팡이는 어두운 농담 같았다.


여름만 되면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날벌레들이 거실 여기저기를 날아다닌다. 전기파리채를 들고 흔들다 보면 눈앞에 파란 스파크가 튄다. 환기를 하려고 창문을 열어두면 모기가 방충망 틈으로 들어온다. 제 때 잡지 않으면 밤새 시달려야 한다. 살기 참 번거로운 집이다. 장마철이 끝나면 거미들이 벽 모서리마다 진을 친다.


청소하는 김에 거미줄도 걷어냈다. 그래도 이 집에서 20년 넘게 살았다. 살다 보면 불편함에 적응하게 된다. 그리고 생활의 지혜는 늘 불편한 경험에서 비롯된다. 엄마는 장마철마다 한 번씩 보일러를 틀고 창문을 전부 열었다. 무의미한 행동처럼 보였는데 다 이유가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이해되지 않았던 일들을 납득하게 되는 순간이 온다.


고통은 이해되지 않는 것들을 이해하려고 할 때 발생한다. 미움이나 불안도 다 여기서 나온다. 걱정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해석하고 분석하는데 열중하지 않는다. 그냥 받아들이고 지나간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넘어간다. 아등바등거리며 애쓰지 않는다. 갑자기 나타난 커다란 벽을 억지로 넘기보다는 돌아간다.


삶은 흑과 백으로 양분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 낮과 밤이 번갈아 찾아오는 거대한 점이지대다. 살면서 겪는 모든 일에 옳고 그름의 차이가 있다고 믿었다. 지금은 방법 혹은 방향성의 차이만 있다고 생각한다. 늘 막막함을 안고 살았다. 걱정과 불안은 걷어낼 수 없는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혀있다. 더는 억지로 떼어내려고 애쓰지 않을 생각이다.


화사한 봄날의 꽃비를 맞으면서 나는 다가올 긴 여름을 걱정했다. 가을밤만 되면 지난겨울의 한파를 떠올리고는 이불속을 파고들었다. 사라지지 않는 곰팡이처럼 불안은 내 삶을 지배했다. 늑골 사이로 자주 비가 내렸다. 비 온 자리에 남은 해석할 수 없는 감정들은 그냥 내버려 둔다. 담담해질 수 없어서 무던해지기로 했다.


본질은 변하지 않지만 태도는 시간이 지나면 달라진다. 늘어나는 나이는 흔들림을 잡는 무게추가 됐다. 지나치게 예민하고 필요 이상으로 섬세했던 내면의 저울이 조금씩 수평을 찾아가는 중이다. 흑과 백 사이의 또렷한 경계선 위에 고요한 회색안개가 내려앉았다. 지난 시절에 붙은 날카로운 이름표를 떼어냈다.


하나둘씩 잃어버리는 것도 있겠지만 과거를 돌아보며 새로 깨닫는 것도 있다. 뒤돌아보고 나서 살아본 적 없는 새로운 지점을 향해 나아간다. 집안 곳곳에 남아있는 흔적들을 보면서 삶의 경험치를 실감한다. 아버지는 공구를 가지고 낡은 집 이곳저곳을 손수 보수했다. 구멍 난 방충망을 실로 기워놓은 엄마의 바느질은 꼼꼼하고 튼튼했다.


살아가기 위해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불편과 맞서 살았던 삶의 기록이다. 그때는 초라해 보였는데 지금은 애틋하게 느껴진다. 늦은 오후가 되자 해는 산을 배고 비스듬히 누웠다. 공원을 내리쬐던 햇살이 천천히 기울어졌다. 창 밖에서 조금씩 밝은 볕이 들어온다. 거실에 불을 끄고 소파에 앉아서 바깥 풍경을 본다. 모처럼 마음이 밝은 날이다. 좋은 여름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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