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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시장나들이

by 김태민

화창한 여름날이다. 10-1번 마을버스는 느긋한 속도로 냉천마을을 지났다. 창 밖으로 보이는 새하얀 적란운이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닮았다. 혀 끝에 닿으면 달콤한 바닐라맛이 날 것 같다. 낮기온은 32도를 훌쩍 넘겼다. 정류장에 내리자마자 열기가 사방에서 맹렬한 기세로 달려들었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횡단보도를 건넜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날씨였지만 중앙시장을 찾은 사람들은 적지 않았다. 부모님께 드릴 간식거리를 사려고 오랜만에 왔다. 정류장 건너 만두와 도넛을 파는 가게 앞은 손님들로 북적였다. 꽈배기를 튀기고 있어서 고소한 기름냄새가 매장 안을 감돌았다.


백앙금이 든 납작도넛이랑 통팥이 든 찹쌀도넛을 샀다. 모양이 예쁜 걸로 사려고 나름 신중하게 골랐다. 점심으로 가볍게 먹을 고로케와 꽈배기는 따로 포장했다. 떡집에서 엄마가 좋아하는 잔기지 떡도 한 팩 샀다. 절편이랑 바람떡도 맛있어 보여서 추가했다.


정식명칭은 개피떡이지만 강원도 사투리인 바람떡이 좀 더 정감이 간다. 어느새 양손이 무거워졌다. 지갑에서 현금을 꺼내서 주인아저씨에게 건넸다. 중앙시장에 갈 때는 늘 현금을 준비한다. 평소에는 거의 쓸 일이 없지만 재래시장은 현금을 선호하는 점포가 많은 편이다. 옛날 생각이 났다.


현금을 주고받던 시절의 시장은 흥정하는 맛이 있었다. 서로 500원이라도 더 깎으려는 상인과 손님의 유쾌한 신경전을 보는 재미가 있었다. 엄마 손을 잡고 따라갔던 박달시장이나 중앙시장은 옛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90년대의 재래시장은 저녁거리를 사러 장 보러 나온 엄마들의 사랑방이었다.


길을 가다 만나면 웃는 얼굴로 인사를 나누고 가볍게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손에 든 까만 비닐봉지는 흥정에서 승리한 아줌마들의 전리품이었다. 콩나물이나 갓 토막 낸 고등어가 들어있었다. 찬거리를 사면 다들 약속한 것처럼 과일가게에 들렀다. 500원 1000원 깎아서 남은 돈으로 플라스틱 바구니에 담긴 제철 과일을 샀다.


우리 가족은 거실에서 드라마를 보며 과일을 함께 나눠 먹었다. 눈을 감으면 눈꺼풀 안쪽으로 알록달록하게 젖은 수채화 같은 추억들이 떠오른다. 시장에 올 때마다 오래된 그리움을 발견한다. 바쁘게 사느라 잊고 살았던 기억들을 만나면 반가운 기분과 함께 지나간 세월을 실감한다.


덕천풍물시장 안에 닭집이 있었다. 생닭을 사면 곧바로 튀겨주는 가게였다. 영양센터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닭집은 커다란 기름솥에 닭을 통째로 넣고 튀겼다. 엄마는 잔업을 마치고 퇴근이 늦는 날이면 꼭 닭집에 들러서 통닭을 사 왔다. 그 시절 우리 가족의 유일한 외식이었다.


요리사 모자를 쓴 닭이 그려진 누런 종이봉투를 건네받으면 뛸 듯이 기뻤다. 더운 김이 피어오르는 통닭을 한 입 깨물면 경쾌한 파열음이 터져 나왔다. 엄마는 닭다리를 뜯는 내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머리를 쓰다듬었다. 세월이 흘렀지만 또렷하게 남아있는 기억이다.


그때는 몰랐던 것들을 하나둘씩 이해하게 되면서 어른이 됐다. 삶은 명쾌한 답이 나오는 수학보다는 은유로 쓴 문학에 가까운 것 같다. 몸과 마음이 지쳐서 막막한 기분을 쉽사리 털어내기 힘든 날이면 간식을 사서 집에 들어갔다. 단골 순댓국집에서 국밥을 한 그릇 먹고 중앙시장까지 가서 떡이나 도넛을 잔뜩 샀다.


무거운 마음은 양손이 무거워지면 이상하게 조금 가벼워졌다. 엄마의 손에 들려있던 통닭이 품고 있었던 삶의 은유를 그때 이해하게 됐다. 까만 비닐봉지에서 꺼낸 간식거리를 그릇에 담아서 안방 문을 열고 부모님께 건넸다. 그러면 기분이 좀 괜찮아졌다. 오늘도 그런 날이었다.


가족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먹이고 싶은 날. 양손 가득 간식을 사들고 부모님을 만나고 왔다. 시장에 갈 때마다 매번 작은 위안을 얻는다. 정겨움이 가득했던 시절은 다 사라졌지만 추억을 떠올리면서 위로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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