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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명학공원

기억하고 기록하다

by 김태민

바람에 꽃잎이 흩날리는 고운 봄이다. 정오의 명학공원을 찾은 사람들은 벚나무 아래서 꽃을 구경하고 있다. 하얀 햇살이 내리는 광장의 분수대 위로 얇은 무지개가 떴다. 명학공원은 안양8동의 얼굴이다. 다채로운 모습으로 계절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 준다. 봄여름철은 벚꽃과 철쭉으로 화사하게 물든다.


가을이 오면 샛노란 옷을 입은 은행나무들이 바람과 함께 춤을 춘다. 눈이 많이 내린 날 공원의 겨울나무들은 희고 투명한 눈꽃을 피운다. 사계절 내내 예쁜 풍경을 볼 수 있다. 생기 가득한 한낮의 공원도 좋지만 늦은 밤의 공원도 매력적이다. 키 큰 나무들 사이를 걷다 보면 꼭 숲 속에 있는 것 같다.


산책로를 따라가다 종종 공원에 사는 고양이들을 만나면 눈인사를 주고받는다. 우리 집은 공원 옆이다. 있으나 마나 한 낮은 담장을 사이에 두고 있다. 가을 저녁에 창문을 열어두면 방울 소리를 닮은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방 안으로 뛰어들어온다. 소리에 이끌려 창 밖으로 시선을 던지면 둥근달이 눈에 들어온다.


사람들이 잠든 늦은 밤에 혼자 별을 보러 공원을 찾는다. 가로등이 불빛이 닿지 않는 자리에 서서 별을 구경했다. 까만 밤하늘에 닿은 나뭇가지가 별빛에 물드는 모습이 참 예뻤다. 저녁 무렵의 명학공원을 제일 좋아한다. 나무그늘 아래서 책을 읽다 저무는 해가 그리는 노을을 본다.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붓이 하늘을 쓸고 지나간다. 타오르는 하늘 아래 붉게 물든 깃털구름이 천천히 흩어진다. 황금빛을 품고 있는 모서리가 이지러지면서 다채로운 색감이 한데 뒤섞인다. 해가 수리산 너머로 새하얀 꼬리를 감추고 나면 밤은 보랏빛 숨을 내쉬면서 기지개를 켠다.


지금은 주민들의 쉼터지만 원래 명학공원은 방치된 공터였다. 나무와 수풀이 무성한 빈 땅이 주택가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낯선 영역이었다. 무성하게 자란 풀숲 한가운데 자물쇠가 걸려있는 낡은 2층 건물이 서있었다. 무릎까지 오는 거친 풀밭은 진입을 반기지 않는 자연의 경고표지판 같았다.


폐쇄된 가축위생시험소분관은 괴담에서 나올 법한 스산함이 감돌았다. 나무들이 둘러싸고 있어서 한낮에도 바닥에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있었다. 그림자가 머무는 작은 숲은 한적했지만 주민들의 발길은 닿지 않았다. 조용한 곳을 좋아했던 나는 창문너머 보이는 풀숲이 싫지 않았다.


버려진 건물 안에 들어가지만 않으면 괜찮을 것 같았다. 이사 올 때부터 집 담장에 공터로 들어갈 수 있는 나무 문이 달려있었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문을 열고 들어가서 혼자서 산책을 했다. 멀리서 볼 때는 조금 을씨년스러웠는데 가까이서 보니 생기가 넘치는 곳이었다.


곤줄박이와 박새가 나뭇가지 사이를 바쁘게 날아다녔다. 멧비둘기와 딱따구리도 자주 보였다. 햇살이 잘 드는 자리에 앉아서 책을 읽거나 MP3로 음악을 들었다. 돗자리를 깔고 누워서 무라카미 하루키나 김영하가 쓴 단편을 읽었다. 작은 숲은 나의 아지트였다. 바람이 불면 숲에서 파도소리가 들렸다.


매일 아침마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면서 잠에서 깼다. 꽃잎처럼 하늘거리는 나비무리와 가을 하늘을 가로지르는 잠자리 떼를 보면서 계절을 가늠했다. 거실 창 아래 펼쳐져있는 풀밭은 고양이들의 놀이터였다. 작은 숲의 고양이들은 수풀 속에 새끼를 낳고 봄이 올 때까지 곁을 지켰다.


20대가 되자 내 아지트였던 작은 숲에 변화가 찾아왔다. 공원이 조성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속에서 아쉬움과 기쁨이 교차했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동네친구와 자주 가서 시간을 보냈다. 생각난 김에 안양을 떠나 먼 타지에 사는 친구에게 명학공원의 봄소식을 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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