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어제보다 조금 더 따뜻해졌다. 며칠 간격으로 눈과 비를 번갈아 뿌렸던 어지러운 환절기가 지나갔다. 온기를 품은 바람이 분다.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느리지만 환한 봄빛으로 물드는 중이다. 나뭇가지 위로 꽃눈이 돋았다. 언 땅을 뚫고 올라온 새순은 이미 떡잎을 떼어내고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중이다. 매년 찾아오는 봄을 글에 담는다.
겨울 내내 봄을 기다렸다. 어두운 터널처럼 긴 겨울이었다. 한 해의 끝을 앞둔 어느 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보이지 않는 내면의 방아쇠를 건드렸다. 가슴에 난 새빨간 구멍을 메우느라 정신없이 지냈다. 그러다 지치면 찬 그늘 아래 몸을 숨기고 계절이 흘러가기를 가만히 빌었다. 그때는 까마득하게 먼 곳에 있는 것 같았는데 기다림 끝에 봄이 왔다.
시간은 공정하고 공평하다. 누구나 삶은 단 한 번 뿐이고 언제나 선택을 통해 새로운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무기력이 지배하는 무의미한 일상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봄꽃이 보고 싶었다. 새하얀 벚꽃이 만개한 명학의 봄을 좋아했다. 매년 안양에서 봄을 맞이하면서 많은 추억을 만들었다. 올해도 그런 봄날을 보내고 싶었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는 절망적인 생각이 들었을 때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동전만큼 작게 빛나는 원이 시선이 닿는 가장 먼 곳에 해처럼 떠있었다. 가만히 머물러있으면 작지만 발걸음을 떼고 조금씩 걷다 보니 천천히 원의 지름이 늘어났다. 겨울의 문턱에서 시작된 터널을 벗어나서 봄의 입구로 들어가고 싶었다. 그래서 계속해서 걸었다.
시간이 지나고 계절이 변해도 기억이 깃든 경험은 남는다. 살아온 날들이 모여서 만든 추억과 온기를 씨실과 날실 삼아서 단단한 동아줄을 만들었다. 두 손 꼭 붙잡고 긴 겨울을 견뎠다. 역전이나 반전 없는 지지부진한 나날들이 이어졌지만 버티면서 걸었다. 느리더라도 앞을 향해 걷다 보면 불안이 들러붙은 기다란 그림자는 등 뒤로 사라진다.
그렇게 쭉 걷다 보니 어느새 봄이다. 중간에 지쳐서 그만둔 적도 있었다. 하지만 하루가 쌓이고 한 주씩 누적되면서 밟고 올라설만한 토대가 됐다. 견디다 보면 지나가고 버티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까치발을 하고 위에 올라서서 벽 너머의 풍경을 본다. 봄이 코 앞까지 다가왔다. 눈앞에 우뚝 서 있는 높은 벽을 바라보면서 느꼈던 막막함은 사라졌다.
환한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출구 밖으로 나와서 겨울이 만든 긴 터널을 돌아보면 입구가 보인다. 먼 길을 지나오는 동안 느꼈던 감정을 정리해서 기록으로 남긴다. 돌아보면서 복기할 수 있도록 정리한다. 계절과 마음의 변화를 착실하게 기록한다. 언제 어디에서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를 글 속에 고이 담는다.
모든 삶은 기록으로 남는다. 종류를 막론하고 예술은 사람이 살다 간 흔적을 담은 기록이다. 감정이나 기억은 눈송이와 같아서 시간이 지나면 점점 작아지다 사라진다. 조금씩 희미해지다 완전히 투명해지면 더 이상 꺼내볼 수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은 때가 되면 눈길이 닿지 않는 곳으로 떠난다. 오래 간직하려면 마음을 담아서 기록해야 한다.
하늘거리며 허공을 날아다니는 감정을 수집한다. 얇고 투명한 날개를 잡아서 풀잎 같은 낱말을 끌어다 글로 엮는다. 다치지 않게 조심스러운 손길로 느슨하게 묶는다. 배제되는 감정은 없다.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나 전부 글이 된다. 날 선 감정은 세월의 풍화작용에 의해 조금씩 깎여나간다. 바다 한 복판에 우뚝 선 날카로운 외뿔 같은 바위는 온몸으로 파도를 맞는다.
서슬 퍼런 칼날을 닮은 모서리는 쉬지 않고 몰려오는 파도를 잘라낸다. 하얀 거품을 쏟아내면서 산산이 부서지는 파도는 멎지 않는다. 세월도 마찬가지다. 쉼 없이 떨어지는 작은 물방울이 바위를 뚫듯이 감정을 이긴다. 시간은 상처를 덮는다. 차츰 무뎌지면서 점점 무던해진다. 그러다 보면 무덤덤해진다. 거대한 바위는 파도를 맞고 매끄러운 조약돌이 된다.
삶을 기록을 하면서 무의미한 순간이 없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됐다. 소중한 것들은 전부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을 통해서 탄생한다. 이름을 불러주면서 따뜻한 손길을 건넬 때 비로소 특별해진다. 소중하게 여기면 아름다워지고 특별하게 대하면 진심이 깃든다. 겨울 동안 기다렸던 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손 끝에 닿은 햇살이 수줍게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