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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도시의 경계

by 김태민

9월은 계절이 변하는 환절기다. 여름이 남긴 흔적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희미해지는 중이다. 한낮의 열기는 해가 기우는 늦은 오후 무렵부터 빠르게 식는다. 아침마다 맑은 이슬이 내리는 백로가 지났다. 밤이 되면 산에서 내려오는 찬공기를 피하려고 창문을 닫는다. 계절의 경계선 위에 서있다.


저녁을 먹고 집 밖으로 나왔다. 명학공원은 산책을 나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머리 위로 구름 한 점 없는 깨끗한 밤하늘이 펼쳐져있다. 발아래 낮게 깔려있는 풀벌레 소리가 잔잔한 바람을 맞고 여기저기 흩어졌다. 가볍게 산책을 끝내고 들어가려다 말고 발걸음을 돌렸다. 조금 더 걷고 싶었다.


성결대사거리를 지나 성문교회 앞 경사로를 타고 넘어갔다. 인도와 도로 모두 한산하다. 도로를 점령하고 서있던 차량행렬은 썰물처럼 안양을 빠져나갔다. 타고 내리는 사람 없는 버스정류장은 하얀 불빛만 덩그러니 놓여있다. 골목길로 접어들면 담장에 그려진 벽화가 눈에 들어온다. 가로등 아래 내 키보다 낮은 담벼락이 길게 늘어서있다.


느린 걸음으로 언덕을 오르다 보면 명학초등학교 정문이 나온다. 누워있는 길고양이 두 마리를 잠시 구경하다 사진을 찍고 다시 걸었다. 보훈마트 앞에서 어슬렁거리는 마트 삼색고양이를 만나서 짧은 인사를 나눴다. 메트로병원 위로 보이는 새까만 밤하늘에 닿은 산그림자는 짙은 청다색이다. 하얀 별 몇 개가 산 위에 걸려있다.


관모봉에서 뻗어져 나온 산줄기가 감싸 안고 있는 안양8동의 또 다른 이름은 두루미마을이다. 사이좋게 나란히 붙어있는 다세대주택들은 전부 불을 끄고 일찍 잠들었다. 멀리서 빛나는 가로등 불빛이 꼭 등대 같았다. 잠자리에 든 사람들은 지금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부드러운 안개 같은 어둠이 내린 명학로를 천천히 걸었다.


주택단지를 빠져나오면 안양고가교가 나온다. 하늘을 가리고 서있는 모습이 마치 거대한 수각류 공룡처럼 보인다. 제1순환 고속도로로 이어지는 커다란 다리는 도시를 가로지르는 장벽이다. 고층 아파트만 한 교각 아래에서 다리 상판을 올려다본다. 조선소에서 건조 중인 커다란 커다란 전함의 용골을 들여다보는 상상을 했다.


차들이 빠른 속도로 고가교를 질주하는 소리는 커다란 짐승의 울음소리를 닮았다. 공원에 앉아서 저녁 풍경을 눈에 담았다. 안양이 한눈에 들어오는 만안청소년수련관 옥상의 야경도 멋지지만 고가교 아래서 보는 낮은 하늘도 좋다. 평온한 밤이다. 금정역을 지나 명학역을 향해 지나는 열차가 도로 옆을 지나간다. 잠시 벤치에 앉아서 별을 세다 일어났다.


다리 건너편은 안양로와 군포로가 맞닿은 도시의 경계다. 산본고가 삼거리를 기준으로 투명한 경계선이 그어져 있다. 도로 위에 어서 오세요 라는 글씨가 붙어있는 커다란 표지판이 걸려있다. 횡단보도를 건너면 군포다. 조금만 더 가면 맥도널드가 나온다. 아이스크림콘이 생각났지만 단념하고 경계선 앞에서 발걸음을 돌렸다.


돌아오는 길에서 가을냄새가 났다. 여름밤의 싱그러운 풀내음과 다른 향이다. 젖은 낙엽에서 맡을 수 있는 가을의 향기다. 가을은 사람들이 잠든 밤에 느리게 한 걸음씩 다가온다. 끝없는 매미의 돌림노래도 어느새 자취를 감췄다. 밤이 아침의 옷자락을 잡고 길게 늘어지는 바람에 하얀 새벽 사라졌다.


계절의 구분선은 여름을 벗어났다. 이마에 살짝 맺힌 땀을 바람이 쓸고 지나갔다. 고개를 돌렸더니 나를 마중 나온 달이 보인다. 노란빛이 감도는 하현망간달이다. 한쪽 귀퉁이가 까만 밤에 물든 모습이 고개를 살짝 기울인 시골강아지 같다. 오늘도 참 좋은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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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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