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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산책

by 김태민

덥지도 춥지도 않은 계절이 오면 평소보다 더 자주 걷는다. 오래 신어서 발에 꼭 맞는 편한 신발을 신고 1시간 정도 산책을 한다. 돌아다니면서 예쁜 풍경이 나오면 잊지 않고 기록한다. 오후에 산책을 나갔다가 풀숲에서 죽단화와 우창꽃을 봤다. 꽃을 보면 꼭 사진을 찍는다. 어제는 못 보고 지나쳤는데 오늘은 눈에 들어왔다.


매일 지나다니는 같은 길이라도 계절과 날씨에 따라 느낌이 다르다. 기분이나 감정이 변하면 시각 같은 감각도 달라진다. 섬세한 온도차를 느끼는 관엽식물처럼 미세한 변화를 감지한다. 들꽃이 부드러운 실바람을 맞고 살랑거렸다. 보이지 않는 투명한 손길이 앞머리를 살짝 쓸고 지나갔다. 흔들리는 꽃망울 사이로 옆으로 누운 햇살이 윙크를 하는 것처럼 반짝였다.


삼아빌라 너머로 보이는 산등성이의 다갈색 그림자는 가을볕에 하얗게 물들었다. 해를 이고 있는 봉우리 위로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이 펼쳐져있다.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능선이 두른 은빛 테두리가 윤슬처럼 반짝거렸다. 산을 품고 있는 우리 동네는 가을이 빨리 온다. 명학을 내려다보는 관모봉은 싱그러운 색감의 여름옷을 벗고 새 옷을 고르는 중이다.


언덕길을 천천히 내려가면 사거리 건너편으로 명학성당이 보인다. 도로 하나를 두고 안양8동과 6동이 맞닿아있다. 문예로는 명학성당 사거리에서 수리산로로 이어진다. 키 작은 연립주택들이 사이좋게 늘어서있는 골목길을 따라가면 검역원 부지가 나온다. 6동에서 제일 좋아하는 곳이다. 담을 허물고 만든 입구에 들어서면 푸른 정원이 눈에 들어온다.


지브리 애니메이션에 나올 것 같은 커다란 나무들이 줄지어 서있다. 울타리를 둘러싼 측백나무들이 만든 담장은 정원 밖의 세계를 구분하는 경계선이다. 까마득한 세월을 이고 있는 고목아래 앉아서 책을 읽었다. 정원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얼굴은 예외 없이 모두 평온해 보였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면서 무의미한 상념을 미련 없이 흘려보냈다.


내면 깊은 곳에 들러붙은 불안감까지 깨끗하게 씻어냈다. 산책을 마치고 오는 길은 마음이 가볍다. 복잡한 생각과 쓸데없는 걱정을 길 위에 두고 집으로 돌아온다. 안 좋은 감정을 끌어안고 잠들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잠을 설치게 만드는 불안은 산책을 하면서 그날그날 다 비워낸다. 햇살이 내리는 한낮의 공원이나 달빛에 젖은 골목을 걷다 무거운 마음을 내려놓는다.


늦은 저녁의 오래된 골목길을 걸으면서 생각을 정리한다. 발을 움직이면 딱딱하게 굳은 마음도 같이 움직인다. 멈춰버린 톱니바퀴를 억지로 돌리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일정한 보폭으로 길을 걷다 보면 잃어버린 리듬을 되찾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과 가늠할 수 없는 마음이 충돌하면서 쏟아졌던 파열음이 고요 속으로 사라진다.


명학역 1번 출구부터 이어지는 만안로를 따라 안양역까지 자주 걸었다. 마음을 비우고 싶을 때마다 나가서 한참 걷다 돌아왔다. 멀리 보이는 도로 끝으로 사라지는 저녁 무렵의 헤드라이트 행렬은 꼭 물결 같았다. 지는 해가 칠하다 만 붉은 하늘이 신호등 위에 걸려있는 모습을 구경했다. 주접지하도 위를 지나는 1호선의 울음소리가 노을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정처 없이 앞을 향해 내딛는 발걸음은 때가 되면 집방향으로 자연스럽게 돌아서게 되어있다. 목적지를 정하고 문 밖을 나선 적은 없지만 발이 닿는 종착역은 늘 집이다. 마음이 집에서 너무 멀어지기 전에 발길을 돌린다. 산책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다. 집으로 향하는 길은 떠날 때보다 좀 더 가깝게 느껴진다. 길 위에 두고 온 해묵은 감정들을 뒤로하고 문을 연다.


부담감을 덜어내면 가슴속에 자리 잡은 무게 추는 제자리를 찾는다. 흔들거리다 쓰러질 것 같아도 매번 다시 중심을 잡고 내 자리를 찾았다. 밖에서 찾은 안식을 끌어안고 잠자리에 든다. 많이 걸은 날은 평소보다 더 깊게 잔다. 오늘 밤은 꿈도 꾸지 않고 금세 잠들 것 같다. 비우고 나면 삶은 한결 가벼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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