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 너머로 파란 하늘이 보인다. 간 밤에 비가 내렸다. 침대에 누워서 속살거리는 빗소리를 듣다 잠들었다. 맑게 갠 청명한 하늘은 선명한 푸른빛을 품고 있다. 거실로 나와서 창을 활짝 열었다. 젖은 나무냄새와 풀내음을 품은 싱그러운 공기가 쏟아져 들어왔다. 맨살에 닿은 바람이 살짝 차가웠다. 의자에 걸어놨던 리넨셔츠를 걸쳤다.
아침기온이 많이 내려갔다. 일교차가 꽤 많이 벌어졌다. 팔을 걷는 대신에 소매단추를 채웠다. 낮최고기온을 나타내는 숫자의 앞자리가 달라졌다. 긴 여름이 끝났다. 며칠간 비가 내리고 나면 가을기운이 온 세상을 감싸게 될 것이다. 계절은 늘 비와 같이 찾아오고 비와 함께 떠난다. 볕이 잘 드는 자리에 서 있는 은행나무는 벌써 이파리 끝이 노랗게 물들었다.
올여름은 참 길었다. 두 달 가까이 이어진 장마와 8월 말까지 건재했던 폭염은 사람들을 지치게 만들었다. 그래서 선선한 가을날씨가 전보다 더 반가웠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 같았다. 산뜻한 바람을 맞자마자 긴 여름의 수렁에서 벗어난 것 같은 해방감을 느꼈다. 선풍기를 끄고 잠들 수 있을 만큼 밤이 시원해졌다. 매미울음소리는 이제 들리지 않는다.
일 년 중 제일 살기 좋은 계절이다. 무더운 여름과 삭막한 겨울 사이에서 만나는 가을은 반갑지만 너무 짧다. 봄가을은 매년 점점 더 짧아지는 것 같다. 먼 미래에는 아예 사라져 버릴지도 모르겠다. 계절만 변하는 줄 알았는데 기후도 달라지는 시대가 됐다.
그래도 올가을은 작년보다 조금 더 길었으면 좋겠다. 떠나는 계절의 옷자락을 붙잡고 늘어지고 싶다.
오래 담아두고 보려고 글과 사진으로 계절을 기록한다. 옥상에서 바라본 하늘이 예뻐서 카메라 셔터를 여러 번 눌렀다. 고추잠자리가 시야를 가로질러 날아가는 모습도 같이 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아래 투명한 빗살을 닮은 햇살이 내린다. 닿은 자리마다 선명한 자연색으로 물드는 풍경을 엽서로 만들면 예쁠 것 같다.
핸드폰 앨범을 들여다보면 가을을 담은 사진들이 가득하다. 매년 명학에서 맞이하는 가을은 아름답다. 산과 천을 품고 있는 명학의 사계절을 보고 있으면 눈이 즐겁다. 다세대주택단지 너머로 보이는 수리산이 옷을 갈아입는 모습이 보인다. 가을은 사람들 몰래 산을 타고 내려와서 온 세상을 울긋불긋하게 채색한다.
안양천 습지를 찾은 새들은 겨울 보금자리를 만든다. 수풀 사이에 둥지를 튼 청둥오리가족이 줄지어 다니는 모습은 동화책에서 그림을 닮았다. 한가롭게 강변을 걷는 두루미와 백로의 모습은 동양화 한 폭을 떼어다 놓은 것 같다. 산책하러 나온 사람들과 습지에 머무는 새들은 서로를 의식하지만 경계선을 넘지 않는다. 평화롭고 편안한 풍경이다.
푸른 생기와 타오르는 열기로 가득했던 여름이 지나갔다. 가을이 빚은 고운 오솔길은 밤그림자 같은 겨울의 터널로 이어져있다. 마음보다 늘 몸이 먼저 계절에 반응한다. 입술이 트기 시작했다. 짧지만 아름다운 날들을 보내면서 내면에 담은 것들을 비우고 정리해야겠다. 습지에 자리 잡은 새들처럼 나도 겨울나기 준비를 한다.
바쁜 일상을 뒤로하고 잠시 주변을 돌아보면 코 앞까지 다가온 계절을 만나게 된다. 아침저녁으로 산책을 하면서 몸과 마음을 비운다. 복잡한 문제나 자잘한 고민을 꺼내서 길 위에 버린다. 불안이나 걱정을 달고 사느라 괴로울 때는 공원에 앉아서 나무를 본다. 무성한 푸른 이파리는 가을이 오면 받는 사람 없는 편지가 된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때가 되면 다 지나간다는 사실을 재확인하면서 용기를 얻는다. 아무것도 아닌 일로 마음이 상해서 신경이 쓰일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사소한 것들 속에 숨어있는 작은 기쁨을 찾는다. 가을을 즐기기 좋은 아침이다. 잠들기 전에 품고 있었던 무거운 기분은 사라졌다. 삶은 아름답지 않지만 아름다움을 하나씩 발견하다 보면 조금씩 아름다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