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원래 이런 건가?
나는 SUV 뒷좌석에 앉아 리서치 시트에 연필로 메모를 하느라 창밖 풍경을 놓치고 있었다.
"다 왔습니다. 여기가 엠포리움입니다. 내리시죠."
박 사장님의 말에 서둘러 리서치 시트를 가방에 넣고 차에서 내렸다. 사진으로 보았던 검붉은 색 건물이 보였다. 인터넷에 이런 건물들이 나올 리는 만무하고, 인도 전문가라던 분이 박사과정을 하던 시절 엠포리움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었다.
아니, 이게 뭔가? 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잠시 두리번거리다가, 다시 리서치 시트를 꺼내서 종이와 건물을 계속 번갈아 보았다. 엠포리엄 로고도 보이질 않고, 안에 서로 다른 가게만 많은 것 같았다. 느낌이 마치 동대문 평화상가 같은데, 평화 상가는 이름이라도 큼지막하게 쓰여있다. 건물로 들어갈 생각은 하지 않고, 그렇게 한 3분 정도나 살폈을까?
"사장님, 여기가 엠포리움인가요? 엠포리움이 브랜드가 아닌가요?"
"이런 엠포리움이 델리에 몇 개 있어요. 그중에 이메일로 사진 보내주신 엠포리움으로 모셔온 겁니다."
"아뇨, 박 사장님. 한국에 계실 때 보면 신세계백화점, 롯데백화점, 미도파백화점, 현대백화점 이렇게 다 여러 가지 브랜드가 있잖아요. 엠포리움이 신세계나 롯데에 해당하는 브랜드가 아니에요?"
"이런 식으로 물건 파는 곳을 엠포리움이라고 불러요."
우리 팀의 리서치 시트는 엠포리움을 현지에서 시작해 덜 고급인 백화점 업태에서 중요한 로컬 브랜드로 보고, 체인 브랜드 간 점포 및 입지, 입점품목을 비교하는 것을 첫 주 업무의 절반 이상이었다. 그런데, 엠포리움이라는 것이 브랜드가 아니다? 그렇다면 "엠포리움"이라는 브랜드와 "Shoppers' Stop", "Lifestyle" 등을 비교한다는 개념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아무래도 엠포리움은 브랜드가 아니라 업태인 것 같다.
쇼핑몰이나 시장 같은 인프라 유형으로 봐야 하나, 아니면 백화점 같은 판매업태 중 하나로 봐야 할까? 모던 리테일과 재래식 소매의 스펙트럼 중에는 뭔가? 몰이라는 개념은 한국에서는 경험해 본 적이 없다. 대학교 1학년에 미국에서 잠깐 본 몰 오브 아메리카나 인도에 오는 길에 들른 홍콩에서나 본 것이 전부인데. 사실 몰 안에 다시 백화점에 있다는 개념은 난 이해가 잘 안 된다. 백화점이 백화점이지.
머리가 완전히 정지되는 것 같았다. 나는 계속 엠포리움 앞에 서있었다. 한 5분은 멍하니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이런 망상 중인지 주변 상권을 육안으로 살피는 중인지 박 사장님은 전혀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겠지, 엠포리움에 데려와 달라고 해서 엠포리움에 데려온 것이니까. 박 사장님 입장에서 목표는 충실히 달성된 것이다. 아, 그래서 인터뷰나 방문신청 같은 어레인지가 필요 없다고 아침에 그랬구나. 한국에서 남대문시장 데려가 달라고 하면 데려다주는 것이지 무슨 어레인지가 필요하랴. 이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잘 알겠으나, 앞으로 더욱 말이 안 통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김 컨설턴트님, 안 들어가세요?"
"아, 네. 들어가야죠. 일단 커피 한잔 하면서 구체적으로 살펴볼 계획을 세울게요."
공항에서 본 금속 탐지기 게이트와 경비복을 입은 사람들이 건물 앞을 지키고 있었는데,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앉을 수 있는 1층 음식점 바깥쪽으로 앉아서 차를 마시는 사람들이 있었다. 곧장 그 옆으로 가 앉아 서류를 펼쳤다. 커피는 시키지도 않았다. 박 사장님은 멋쩍은 듯 주문 카운터 쪽을 잠시 쳐다보다 내 옆에 앉아, 내가 들여다보는 조사계획을 말없이 힐끗거렸다.
우리 조사계획은 완전히 개념이 틀렸다. 이건 롯데 vs. 신세계나 롯데 vs. 현대 같은 구조가 아니라 신세계 vs. 백화점이라는 것을 분석 프레임워크로 삼은 것 아닌가? 어떤 단위로 비교해야 한다는 걸 어떻게 정해야 하는 건가? 나는 솔직히 아무 판단도 할 수가 없었다.
인도는 인터넷이 아직 충분히 보급되지 않았고, 인터넷에 있는 내용이 현실을 충분히 반영할 수 없다고 했다. 중국 못지않게 통계를 믿을 수 없는 곳이라나. 우리는 그래서 인도에서 박사를 마치신 전문가를 Hire 해서 몇 번이나 오리엔테이션을 듣고 리서치 계획도 세우지 않았던가? 한 번 초안을 낸 것도 아니고 현지 전문가와 다섯 번, 여섯 번이나 같이 검토회의를 하면서 세우고 고친 프레임워크다.
아니, 이럴 거면 인도 현지 전문가는 도대체 왜 Hire 해서 이 프레임워크를 짠 거지? 이 사람이 소매산업 전문가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여기서 박사과정을 마칠 때까지 살았으면 엠포리움은 신세계백화점 같은 체인의 브랜드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텐데. 여기서 백화점에 가보지 않는 삶을 살았던 건가? 사람도 밉고, 출국 전날 밤 10시까지 머리를 맞대고 끙끙댄 리서치 시트가 무용지물이라는 것에 허탈감이 들었다. 곧이어 그걸 대체할 리서치 시트가 없다는 공포감이 밀려왔다.
이메일은 호텔에 돌아가야 보낼 수 있다. 이메일을 보낸다고 서울에 있는 사람들이 별 수 있기는 할까? 거기서 찾을 수 있는 최고 전문가가 동원돼서 수립된 계획이 이건대? 메일을 보내서 뭔가 대안이 온다는 것은 정말 빨라야 내일 낮이나 될 것이다. 델리 1주, 뭄바이 2주, 다시 델리 1주가 임원단 방문 전까지의 첫 단계 출장계획이다. 델리의 상황을 파악할 7일 중 이틀이 사라진다.
내 지식수준에서 이걸 문제로 정리해서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 호기로웠던 스물셋의 그 녀석을 쫓아가 뒤통수를 한 대 때리고 싶었다. 그러길래 너 혼자 오는 건 아니고 누군가를 따라오는 경우에만 왔어야지.
나의 시각에 의한 정리는 오해를 더 키울 수 있고, 섣부른 대안제시는 일을 더 그르칠 수도 있다. 한 달 뒤로 예정되어 있는 롯데그룹 임원단의 방문과 내가 해야 할 보고가 생각났다. 프로젝트 매니저(PM)가 이 리서치 시트를 채워서 읽으면 된다고 했는데. 식은땀이 났다. 8월 중순 뉴델리는 이렇게 더워서 이미 땀이 줄줄 흐르고 있는데, 그 위로 식은땀이 나다니. 나의 사고 기능은 정지했다.
서울의 PM에게 그냥 전화를 하기로 했다. 멍청해 보여도 처지를 직면한 그대로 설명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 지금 서울은 오후 2시니까 PM은 당연히 오피스에 있을 때다. 비행기는 길게 탄 것 같은데, 생각보다 멀지 않은 나라라 다행이다. 시차가 컸으면 어쩔 뻔했는가?
"이 선생님, 상도입니다."
"어, 그래 상도야. 잘 도착했지? 아침에 메일 확인했다. 날씨 어때? 많이 덥지? 나도 작년에 갔을 때 정말 죽겠더라고."
안부에 답도 하지 않고 본론부터 말했다. 지금 안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선생님, 가져온 리서치 시트대로 조사를 할 수가 없을 것 같아요."
"그게 무슨 소리야?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어? 어딘데? 몇 번째 줄? 같이 보자."
"그게 아니라, 엠포리움이 체인 브랜드가 아니랍니다."
"응?"
"조사대상이 없어요. 그냥 이런 형태로 물건 파는 곳들을 다 엠포리움이라고 한데요."
"..."
PM도 아무런 답을 하지 못하고, 20~30초 정도 정적이 흘렀다.
"상도야, 일단 좀 대기하고 있어 봐. 내가 상의 좀 하고 곧 연락 줄게."
그렇게 전화를 끊고 한 시간 정도 지난 것 같았다. 시계를 보니 15분밖에 안 흘렀다. 서울에서는 엄청나게 번개같이 논의한 것임에 틀림없지만, 나의 시간은 정말 느리게 갔다. 옆에 박 사장님이 앉아 있다는 것도 깜빡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넋이 나간 상태였다. 박 사장님도 조용히 눈만 꿈뻑이며 흘끗 흘끗 내 얼굴을 볼 뿐 아무 말도 걸지 않았다. 전화가 울리자, 박 사장님이 일어서면서 잠깐 주변을 둘러보고 오겠다고 말했다.
"상도야, 오후 조사부터 먼저 하고 또 그런 것 같으면 그 이후의 조사들을 계속 먼저 당겨서 하고 있어. 박 사장님한테 순서 바뀌는 대로 동선 바꿔달라고 이야기하고. 서울에서 조사 계획을 다시 좀 수립해 볼 테니까, 일단 Fact Finding부터 먼저 진행하고 저녁때마다 그날 그날 Finding 정리해서 보내주고. 융통성 있게 뒤에 있는 것들, 어차피 확인해야 할 것들 먼저 잘해봐. 잘할 수 있지? 우리가 계획 수정해서 메일로 보내주면 호텔에 프린터는 있니?"
"호텔에 프린터요? 방에는 없는 것 같은데요."
"호텔에 비즈니스 센터가 있으면 거기에 프린터가 있을 거야."
아침에 로비 소파에서 조식뷔페로 걸어가는 길에 보였던 2층으로 가는 계단 앞의 비즈니스 센터라는 표지판이 떠올랐다.
"아, 네. 호텔에 비즈니스 센터 있는 것 같아요."
"응, 그래 그럼 보내주면 그때 비즈니스 센터 가서 다시 인쇄하면 되겠다."
"근데, 길거리 설문지를 다시 인쇄해야 하면 어떻게 하죠? 2천 부인데, 호텔 비즈니스 센터에서 하면 정말 말도 안 되게 비쌀 텐데요."
"아, 그렇지... 그것도 문제네."
이 선생님은 10여 초 정도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그럼 우리가 일단 인쇄해 간 설문부터 바꿔야 할 것이 있나 먼저 확인해서 논의해 보고, 그것부터 어떻게 대응할지 알려줄게. 이따 다 돌아보고 호텔로 돌아가기 전에 메일로 보내놓을게."
"네, 알겠습니다. 당겨서 할 수 있는 거 뭐 있는지 일단 살펴보고 되는대로 먼저 할게요."
"그래, 상도야. 고생이 많다. 날 더운데 더위 안 먹게 조심하고, 음식 조심해. 특히 물 조심해라."
"네, 선생님. 들어가세요."
서울과 통화를 마치자, 이미 십여 걸음 앞에서 서성이고 계시던 박 사장님이 옆 자리에 바로 와서 앉았다. 통화가 끝날 때까지 일부러 거리를 둔 것 같았다.
"뭐랍니까? 어떻게 할까요?"
박 사장님은 경상도 분이셨구나. 지금까지는 몰랐던 억양이 느껴졌다.
"뒷부분 조사 중에 당겨서 해야 할 것들을 먼저 하라고 하시네요. 일단 오늘 오후에 하려고 하던 것을 오전에 하라고 했고... 아, 내일 네루대학교 학생들이 호텔로 오기로 했던 것 같은데 나눠 줄 설문지를 바꿔야 할 가능성이 있어요. 모레 오라고 해도 괜찮을까요?"
"근데, 오늘은 오후까지 엠포리움 보는 게 일정이었는데요. 일단 그래도 인도 오셨으니까 델리 시내나 한 번 구경하실까요? 일단 제가 네루대 학생 대표한테 전화하고 얘기하시죠."
아, 그렇지. 엠포리움을 2-3시간 눈으로 구석구석 살피고 점심을 먹은 뒤에는 엠포리움 담당자 하고 인터뷰도 주선해 달라고 했었지. 박 사장님 말은 하나도 틀린 것이 없었고, 탓할만한 잘못도 없다. 하지만, 갈수록 말이 더욱 통하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확고하게 들었다.
열댓 걸음 떨어진 곳에서 박 사장님은 통화를 하고 있었다. 네루대 학생 대표와 통화하는 것 같았다.
싸한 느낌이 깊숙이 밀려온다. 혹시, 엠포리움이 아닌 다른 곳들도 인터뷰도 주선이 하나도 안되고 차량과 장소 이동 계획만 준비된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