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3. 코넛 플레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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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ngseok M Oh

"네루대 학생들이 이미 약속한 일정이라고 시간을 바꾸기 곤란하다고 하네요. 설명은 예정대로 내일 호텔에서 하시고, 설문지를 다음 날 아침에 가져가라고 하시죠."


대답을 곱씹어봤다. 다음 날에도 시간이 된다는 이야기인데 약속을 못 바꿔주겠다니, 모든 것이 뜻대로 안 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박 사장님은 나한테 묻지 않고 학생들에게 약속을 다시 그렇게 확정해 준 건가? 밀린 감정을 한 번에 쏟아내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나에겐 이 사람뿐이다. 내 짧은 영어만 가지고 해 나갈 수 있는 일은 없을 것만 같다. 기력도 없다. 나는 무기력하게 넘어가기로 했다.


"네."

"일단 여기 상권 한 번 돌아보시고, 그리고 차로 코넛 플레이스 인근을 한 번 둘러보시지요. 인도 왔는데, 카레도 좀 드셔보시고요."


우리 팀의 핵심 가설은 고객사가 일반 백화점이 아닌 고급 백화점 포지션으로 진출해야 승부를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더불어 대형마트가 함께 들어올 수 있으나, 마트 역시 백화점과 마트 사이 중간의 포지션으로 프리미엄 성격을 강조해야 경제성 있는 사업모델이 나올 것이라는 가설이다. 현지 업체들과 가격경쟁력으로는 승부를 볼 수 없을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 뒤에 마트 수준에서 구색을 갖추기 위해 현지 공산품 조달이 어느 정도 가능한 지를 확인하는 것이 나의 미션이었다.


엠포리엄 앞사람들의 행색은 고급 명품을 사는 사람들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어 보였다. 현지 공산품 조달을 이유로 한 번쯤 둘러볼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이 제품들을 조달해서는 프리미엄 포지션에 도움이 안 되는 정도가 아니라 걸림돌이 될 것 같았다. 고객이 어떻게 해야 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데 쓰기는 글렀다. 현지업체들의 제품 품질은 이렇게 형편없으니, 제품 및 서비스 차별화 전략이 더 잘 작동할 거라는 가설을 보완하는 정도로 쓸 수 있어 보였다.


나는 박 사장님을 따라 걷기 시작하며, 디지털카메라를 꺼내 손에 들었다. 배터리가 없었다. 홍콩에서 한참 찍고 나서 니꼬 호텔에 체크인 한 뒤에는 충전하는 걸 깜빡했다. 이것도 기록으로 남기기는 글렀구나. 나는 마음을 비우고 걷기 시작했다. 전시된 물건들은 별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홍콩 IFC 몰에서 보았던 명품과 하이브랜드 제품들, 쇼핑몰의 시원하고 쾌적한 분위기가 머릿속을 지나갔다. 단순히 반대라는 생각보다는 초현실적인 기분이 들었다.


코넛 플레이스. 홍콩 IFC 몰을 돌아보고 나와서 우체국 건물과 장국영이 죽었다던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을 보며 담배를 태우던 생각이 났다. 잠깐, 거기도 코넛 플레이스였는데? 이거 정말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박 사장님의 다리만 쳐다보며 30분 남짓 걷다 보니 어느새 출발했던 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박 사장님, 홍콩에도 코넛 플레이스가 있었던 것 같은데요."

"아, 그럴 수 있죠. 홍콩도 영국이 지배했으니까요. 인도도 영국 식민지였습니다. 영국 사람들이 이름 지은 걸 거예요. 춘천에도 명동 있잖아요. 이제 코넛 플레이스로 한 번 가보실까요?"


코넛 플레이스는 그냥 로터리였다. 차가 신호에 따라 멈추지 않고 계속 돌아나가는 로터리. 시내에서는 본 적이 없는 형태였다. 중심가라는 의미 같았지만, 차만 많았을 뿐 발전된 도시의 느낌은 아니었다. 신호가 없어 멈추지 않는 터라 30초도 되지 않아 차가 로터리를 빠져나갔다. 내려서 주변 상권을 조금 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심란한 마음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박 사장님은 금세 나를 보챘다.


"12시 되었는데, 점심 드시고 더 보시죠. 인도에 와서 카레 안 드셔보셨죠? 한국과는 다르게 카레 종류가 아주 다양해요. 인도 왔는데 한 번 드셔보셔야죠."


어젯밤 늦은 시간에 입국해 호텔에 체크인한 걸 알면서 왜 묻나 싶은 짜증이 올라왔다.


"네, 인도 카레 좋을 것 같네요."


표정을 걷어내고 SUV에 몸을 싣었다. 20분쯤 지나 주차장이 딸린 식당에 도착했다. 박 사장님은 힌디어로 능숙하게 주문을 했다. 손을 씻기 위해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하고 일어섰다. 초조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던 나는 화장실로 향하기 전에 가게 밖으로 나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이유 없이 메고 있던 가방 안을 들쳐보았다. 첫 출장 멀리 온다고 이 선생님이 선물로 사주신 폴스미스 메신저 백이었다. 사실, 한 번도 수입 브랜드 가방을 가져보지 못한 나에게는 출장 물품이 아니라 명품이었다. 디지털카메라도 그대로이고, 잃어버린 버린 물건은 없었다. 잃어버린 것은 나의 정신 줄 뿐이었다. 담배를 끄고 화장실에 들렀다가 자리로 돌아왔다.


담배를 태웠더니 마음이 조금 안정되었는지 식당 안의 풍경이 다시 보였다. 분명히 로컬 음식만 있는 식당이지만 이 동네에서는 제법 고급스러운 식당 같았다. 전체적으로 흰 벽에 원목 색의 테이블과 의자가 있었고 바닷빛 같은 푸른색의 장식들이 많아 시각적으로 시원해 보였다. 테이블 간격도 제법 넓었고 손님이 앉지 않은 테이블들은 모두 깨끗했다. 종업원들이나 손님들의 복장도 단정했다. 시장통 같은 시끄러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손님들은 너무 크지 않은 소리로 조곤조곤 얘기하고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음식 냄새는 있었지만 불쾌한 냄새는 없었다. 에어컨이 눈에 보이진 않았지만 식당 안이 많이 후덥지근하지는 않았다. 생각해 보니 식당 앞에 손님들을 위한 주차 공간이 있다는 점도 고급 식당이라는 점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자리에 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긴 접시 같은 그릇에 담긴 카레 두 그릇과 밀가루로 만든 난 몇 장과 안남미로 만든 것 같은 밥이 나왔다.


붉은색 카레와 녹색 카레를 순서대로 가리키며 박 사장님이 이야기했다.


"이건 치킨 빈달루라는 카레예요. 치킨이 들어갔는데 매콤할 겁니다. 이 녹색 카레는 팔락 파니르라는 카레예요. 이건 아마 한국에서는 파는 곳이 없을 거예요. 시금치 카레인데 삭힌 우유, 그러니까 치즈로 만든 카레예요. 빈달루가 너무 매울 수 있을 것 같아서 같이 시켰어요."

"네, 근데 카레가 녹색이 있나요? 카레는 원래 노란색이나 주황색 아닌가요?"

"이거 말고도 카레는 종류가 아주 많습니다. 한국으로 치면 분식 같은 분류이지 하나의 메뉴가 아니에요. 일단 난을 손으로 찢어서 카레를 조금 얹어서 드셔보시고, 난 다 드신 다음에는 밥에 비벼서 드셔보세요."

"네, 사장님도 맛있게 드세요."


치킨 빈달루는 새롭기는 했지만 별 거부감이 느껴지진 않았다. 이게 원래 인도의 원조 카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팔락 파니르는 좀처럼 손이 가질 않았다. 한국에서 먹어오던 음식과는 뭔가 이질감이 들었다.


박 사장님이 눈치를 채셨는지 나지막이 웃으며 한 번 더 음식을 권했다.


"녹색이라 잘 손이 안 가시죠? 그래도 한 번 드셔보세요. 지금 아니면 언제 또 드셔보시겠어요"


멋쩍은 웃음을 잠깐 짓고는 난 위에 녹색 카레를 올려 입에 넣었다. 많이 새롭기는 했지만 향이나 식감, 맛에서 느껴지는 거부감은 없었다. 삭힌 우유가 아니라 처음부터 그냥 치즈라고 말해줬으면 거부감이 덜했을 것 같다. 식사를 거의 다 해갈 즈음, 나는 손을 들고 점원과 눈을 마주치며 이야기했다.


"코카콜라 플리즈"


종업원은 나를 보며 인도 엑센트로 코카콜라라고 다시 한번 얘기했고, 잠시 후 얼음이 담긴 잔과 코카콜라가 나왔다. 한국에서 경험해보지 못한 더위에 얼른 콜라를 시원하게 마시고 싶었다. 얼음 잔에 콜라를 따르면 거품이 많이 난다. 목이 따갑고 시원하도록 한가득 마시기 위해서는 두 번에 나눠 따라야 한다. 캔을 따고 얼음잔에 따르려는 찰나 나를 보고 있던 박 사장님이 입을 열었다.


"얼음은 드시지 마세요."


나는 멈칫하고 박 사장님을 쳐다봤다.


"그 얼음 드시면 물갈이하실 거예요. 인도는 물 자체가 한국이랑 다릅니다. 엄청 고생할 거예요"


출장 전 마시는 물을 조심하라는 얘기를 들었던 것이 떠올랐다. 얼음이 물로 만든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고 있다가 그 순간 깨달았다. 에비앙은 괜찮지만 비싸고 다른 Spring Water도 불안하니 무조건 생수병에 들었다고 사 먹지 말고 코카콜라의 distilled water인 Aquafina가 제일 확실하다고 했다.


다양한 감정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박 사장님과의 대립 구도를 생각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명품도 있지만 생활필수품도 포함해 유통시장을 확인하러 온 나인데, 나는 정말 이곳에 대해 아는 것이 없고 배운 것으로부터의 추론능력도 부족했다. 내가 5 Forces와 4P를 외우고 있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나는 이곳에 대해, 아니 내가 해결하려는 문제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앞에 앉아 있는 박 사장님도 단순히 나를 골탕 먹이려는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고 내 뜻대로 해줄 사람도 아니다. 답답한 마음과 조급한 마음이 번갈아 왔다.


조금 진정하지 않고는 뭔가를 계획하거나 판단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하게 할 수 있는 것부터 해놓아 나중에 걸릴 시간을 줄여놓는 것이 최선이었다. 문득 센서스 자료가 생각났다. 아직 인도는 인터넷이 발전하지 않아 지역별 인구통계나 소득자료가 부정확하다고 했다. 인터넷에 정부가 발간하는 데이터보다 오프라인에서 구매하는 백서형태의 자료가 더 정확하고 상세하다고 했다.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우리나라의 갖가지 백서가 있던 장면이 기억났다.


"박 사장님, 식사 마치고는 서점으로 데려다주실 수 있나요? 서울에 교보문고나 영풍문고처럼 가장 큰 서점이면 좋겠습니다."

"네, 여기 가까이에 옥스퍼드 서점이라고 있는데, 어떤 책을 사시려고요?"

"인구통계 센서스 자료랑 다른 정부 발간 백서들이 있으면 좀 사려고요."

"아, 그게 찾는 자료가 있을지는 잘 모르겠는데, 그런 게 있다면 옥스퍼드가 맞을 것 같긴 하네요. 거기서 없으면 델리대학교 학생에게 부탁해서 도서관에서 열람하고 복사해 달라고 해야 할 것 같아요."

"복사할 페이지를 다 살피게 설명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닐 것 같은데요?"

"있을 수도 있으니까, 일단 서점에 한 번 가 보시죠."


식당에서 계산을 마치고 불안한 마음을 지우지 못한 채 박 사장님을 따라나섰다. 차를 타고 10분도 되지 않아 서점에 도착했다. 박 사장님은 입구까지 나를 안내해 주더니 근처에서 볼일을 볼 테니 나 혼자 들어가 살펴보고 근처 주차장에서 만나자고 했다. 하긴, 서점 안에서 책을 찾는 내내 멀뚱히 서있기는 애매할 터였다.


나는 서점에 들어서자마자 직원에게 센서스 책과 정부 백서의 최신 판을 찾는다고 이야기했다. 영어가 통하지 않으면 어쩌지 걱정했는데, 다행히 서점의 직원은 영어를 잘했다. 곧장 2층으로 나를 안내해 줬다. 흰 책자가 잔뜩 꽂혀있는 서가를 향해 손가락을 뻗어 알려주고는 1층으로 돌아갔다. 센서스와 백서를 찾는 사람들은 그 자리에 앉아 한참을 뒤져본다는 것을 직원은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올해는 2005년, 떠나오기 전 인터넷으로 확인할 할 수 있던 가장 최신의 센서스는 1991년 것이었다. 전 세계의 많은 기업들이 골드만 삭스가 얘기하는 BRICs를 따라 이곳에 왔다. 나는 그 보고서의 전문을 보지도 못했지만, 그 보고서의 내용이라며 돌아다니는 발췌 요약본에 들어있는 인구 및 경제성장에 대한 테이블이 우리 회사가 가지고 있는 최신의 정보였다. 2001년에 센서스가 또 있었다는 사실은 확인했지만, 그 자료는 인터넷에 공개되지 않았다.


흰 책자들은 2001년의 인도 센서스였다. 찾았다. 성배를 찾은 인디아나 존스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홍콩을 지나 인도로 와서 처음으로 컨설팅 보고서의 결정적 분석에 들어갈만한 데이터를 찾았다. 관련 있어 보이는 모든 주변의 책들을 뽑아 들었다. 가방에는 담을 수 없는 양이었다. 인쇄와 제본상태를 살펴가며 가장 깨끗해 보이는 본들로 골랐다. 고르는 내내 가슴이 두근거렸다. 책이라는 것이 이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있을까? 웃음이 얼굴에서 떠나질 않았다.


책을 뒤지다 보니 어느새 한 시간 반 가까이가 지나있었다. 빠뜨리거나 겹치는 Volume이 없는 몇 번이고 확인하고 나서야 1층 계산대로 향했다. 계산을 마치고, 책들을 한 아름 안고 주차장으로 갔다. 렌터카의 본넷 위에 책을 올려놓고는 박 사장님의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었다. 차가 보이는 곳에 있었는지 멀리서 박 사장님이 운전기사와 함께 손을 흔들며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아름다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였다. 나 자신이 너무 자랑스러웠다. 대학 합격전화를 따로 받았을 때도 이만큼 자랑스럽진 않았던 것 같다.


"사장님, 찾았어요. 센서스 책이 있네요."

"잘 되었네요, 하하. 기분 좋으신가 봐요. 웃는 얼굴 처음 보는 것 같네요."


박 사장님도 오래 알고 지내오던 동네 아저씨 마냥, 아니 삼촌 마냥 웃음을 기분 좋게 웃음을 지어줬다. 일행 모두가 종일 가지고 있던 긴장감이 순식간에 사라진 것 같았다.


문득, 주차해 놓은 차에서 물건을 훔쳐가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던 기억이 났다. 책은 도난의 대상이 아닐 것 같았지만, 나에게는 보물과 같았고 단 1%의 위험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동선계획도 막막했기에 박 사장님께 호텔에 들렀다가 가자고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박 사장님, 호텔이 멀지 않으니 호텔에 책을 가져다 두고 시내를 조금 더 둘러볼까요?"

"네, 뭐 그렇게 하시죠."


15분 정도를 이동하니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마저 반가웠다. 박 사장님께는 잠시 방에 다녀올 테니 호텔 로비에서 앉아서 가보면 좋을만한 현대식 몰들을 몇 개 찾아달라고 이야기하고 방으로 올라왔다. 방 한 편에 사 온 책들을 잘 정리해 놓고, 들뜬 마음으로 노트북 전원을 켰다. 서울에 있는 프로젝트 매니저에게 이메일을 썼다. 센서스 책 Volume명과 주요한 목차들을 간단히 정리해 첨부하고 보니 어느새 한 시간이 넘게 지나 시간은 4시가 되어 버렸다.


서둘러 1층으로 내려더니 박 사장님은 로비의 소파에 앉아 수첩을 뒤적이고 계셨다. 내가 소파로 거의 다가갔을 때쯤 박 사장님이 입을 열었다.

"첫날이니 무리 말고 시내에 가서 저녁식사나 하실까요?"

내가 뭐라고 답을 해야 하나 잠시 망설이는 찰나, 연달아 박 사장님이 덧붙였다.

"오늘 어디 둘러보기는 쉽지 않을 것 같고, 가서 같이 식사하시면서 내일/모레 동선 말씀 나누시죠."

"네, 그럼 코넛 플레이스 쪽으로 가서 한 번 살짝 상권 둘러보고 식사 같이 하실까요?"

이 사람은 프로젝트의 진척도라는 개념이 없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은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듣고 따르면 일이 해결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분은 그런 부분에 대한 생각이 아예 없는 것 같다. 프로젝트의 현지 업무 코디네이터가 아니라 관광 가이드를 자처하려는 심산인가 싶었다. 나만 마음이 다급하다. 답답한 마음이 들었지만, 일단 별 수 없기에 따라나섰다.


조바심을 내는 내가 느껴졌는지, 박 사장님은 곧바로 식당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차량이동이지만 시내 몇 곳을 차 안에서 둘러볼 수 있도록 둘러둘러 코넛 플레이스로 갔다.


"여기가 밤에는 아주 무섭습니다. 치안이 좋지 않아요. 여자분들은 오시면 해지면 혼자 못 다녀요. 납치당하고 그런 일들이 많아요."


묻지도 않았지만 동네에 대한 소개를 그렇게 했다. 가다 서다를 한 시간 조금 넘게 반복하고였을까, 박 사장님은 나를 비교적 현대식 상가건물의 루비 튜즈데이라는 식당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생긴 것은 영낙없는 한국의 TGIF를 떠올리게 했다. 색상이나 조명이며, 인테리어 콘셉트까지 거의 같았다. 메뉴판도 비슷한 듯 보였다.


"아까는 인도 음식 드셨으니까, 이번에는 좀 익숙한 것으로 드시라고 미국 식당으로 했습니다."


사실 한국에서도 TGIF를 가본 것은 두세 번 정도 밖에는 되지 않는 것 같다. 대학을 4년을 꽉 채워서 다니지도 않고 성급하게 직업전선으로 뛰어든 나는 남들처럼 대학생활을 충분히 누리지도 못했고, 남들 다 간다는 식의 레스토랑도 몇 번 가보지 않았던 것 같다. 어쨌든 한 번이라도 먹어본 것으로 시키는 것이 안전하리라.


"One Chicken Fajitas, Please."


박 사장님은 마른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식욕이 크게 도셨는지 베이비 립을 시키셨다. 오늘의 성과야 어쨌든 아침 일찍부터 종일 돌아다닌 것 때문에 허기지셨나 보다. 주문을 마치고, 나는 레스토랑 곳곳에 앉아있는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여기는 한국물가 기준으로는 저렴한 편이지만, 인도 기준으로는 조금 돈 많은 사람들이 오는 곳입니다."

내가 사람들의 행색을 살피는 것을 느낀 것 같다. 옷을 어떤 것들을 입나, 옷의 품질은 어떠한가, 익숙한 서양 브랜드가 있나를 살피고 있었다. 이번 프로젝트의 모듈 중 두 가지와 연관되어 있다. 한 가지는 사람들이 글로벌 브랜드 제품들을 소비할 여력이 있는가 하는 시장분석의 한 포인트, 그리고 현지 벤더로부터의 제품 구매/조달 가능성을 평가하는 항목이 이 프로젝트에 포함되어 있다. 두 번째는 중간보고 이후에 본격화될 예정이지만, 첫 번째는 중간보고 이전에 거의 분석이 완료되어야 한다.

대체로 모두 재래시장에서 파는 물건과 알 수 없는 브랜드, 가품들로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도에 오기 전에 들렀던 홍콩에서 명품들이 즐비한 몰을 사전 투어했던 것은 큰 의미가 없어 보였다.

오전에 들른 엠포리움보다 조금 상위의 제품들인가 싶다가도, 그냥 사실 다시 좌판에 놓고 파는 재래시장의 제품들 같기도 하다. 나는 이 분야에 안목이 모자라다는 점을 새삼 느꼈다.


어느새 철판 위에 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화이타와 큰 쟁반에 담긴 베이비 립이 서빙되었다. 내가 화이타를 향해 포크를 드는 순간 레스토랑이 암흑천지가 되었다.


"정전이에요. 자주 있는 일입니다. 금방 다시 들어옵니다."


30초나 흘렀을까, 철판의 지글거리는 소리가 잦아들 때쯤 깜빡이며 불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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