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간 전 연재] - 프롤로그
11월 늦가을의 어느 밤. 일찍 잠에 들었는데 새벽 한 시에 문득 눈이 떠졌다. 임신을 한 지도 어느덧 17주 5일. ‘내년 봄, 출산과 함께 성인 영어회화 티칭을 마무리하게 되겠구나’ 하는 어렴풋했던 생각이 처음으로 확실한 문장이 되어 이불을 덮은 가슴에 묵직하게 와닿았다. 물론 좋아하는 일이니 이어나갈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아기를 키우는 첫 일 년은 지금과 같은 일대일 수업이 어렵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나의 경험을 정리해야만 해’ 하는 조바심이 번뜩 들었다. 2019년부터 지금까지 만난 수강생 수를 따져보니 350명 가까이 된다. 대부분 일대일 수업이었으니 350건의 케이스 스터디를 한 셈이다. 강사로서의 경력이 아주 긴 건 아니지만 4년이면 새로운 학위를 따고도 남았을 시간 아닌가? 그동안의 경험을 정리하면 꽤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 같았다.
다시 내가 새벽 한 시에 잠에서 깬 부분으로 돌아가자면, 더 자고 아침에 생각하자며 눈을 감고 잠을 청했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이미 새로운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는 걸 알아버린 내 몸에서는 아드레날린이 팡팡 터지고 있었고 몸을 뒤척여봐도 신이 난 생각들이 달그락거려 더 이상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결국 담요를 두르고 작업실에 들어가 머릿속에서 꺼내달라고 아우성인 생각들을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기억에 남는 수강생들의 일화를 적다 보니 사실 나부터가 성인이 되어서 영어 말하기를 시작한 대표적인 케이스였다.
87년생인 나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께서 시간관리를 철저하게 시키시며 집에서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신 덕에 사교육 없이도 전교 상위권을 유지할 수 있었고, 영어 듣기 평가 점수와 독해능력도 나쁘지 않았다. 한국 특유의 주입식 교육 환경과 입시 속에서 나름의 최선을 다했고 그 결과 서울 4년제 대학에 무난하게 입학했다. “뭐야, 영어 원래 잘했네” 싶을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영어 스피킹을 시작한 건 대학에 입학한 이후였고, 난생처음 원어민 앞에서 말을 해야 하는 상황이 닥치니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는 게 핵심이다. 대학교 1학년 1학기, 교양 영어회화 수업에서 2분 정도의 자기소개도 원하는 대로 못했을 때의 충격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수업에서 삼삼오오 모여 앉은 유학파 학생들이 영어로 자유롭게 웃고 떠드는 것을 보면서 어쩐지 나는 미지의 목적지에 불시착한 기분이 들었다. 영어를 잘하고 싶어진 건 그때부터였다.
성인 영어수업을 해오면서 과거의 나와 같은 수강생님들을 많이 만났다. 분명히 시키는 대로 적어도 10년은 넘게 그 스트레스를 받아가며 영어를 공부했는데 막상 “How are you?”라는 물음에 멋쩍은 웃음만 짓고 있는 자신이 답답한 거다. 그 마음 이해한다. 많은 경우에 한국인들이 영어를 ‘정복해야 하는 어떤 것’으로 여기거나 또는 ‘막연한 동경의 대상’으로 느낀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영어를 장기적으로 성장시킬 수 있는 방법보단 당장 ‘잘하는 것처럼’ 들리는 방법에 더 관심이 많다는 안타까운 사실도 함께.
이 책에서 내가 전하고 싶은 건 ‘비원어민으로서 영어를 소통의 도구로 사용하는 즐거움’이다. ‘이것만 하면 귀가 뚫리고 입이 트인다’ 같은 비법이 아닌 순도 100%의 실제 나의 영어 성장 과정을 공유하고 싶었다. 1장에서는 한국의 정규교과과정 안에서 성실히 공부했지만 막상 영어로 제대로 대화를 할 수가 없었던 대학생 시절부터 미국 인턴십, 미국 크루즈 선사에서의 7년 근무를 거치며 영어를 생활 속에서 편안하게 사용하게 되기까지의 영어 성장기를 담았다. 2장에서는 성인 영어회화 강사로서 다양한 수강생님들과 수업을 하며 얻은 인사이트를 통한 나의 의견과 조언들을, 3장에서는 현재도 이어지고 있는 나의 영어 성장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았다.
사실 작가로서의 내가 가장 잘하고 싶은 것은 한국어다.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끊임없이 탐독하고 매일 쓰고 생각하며 표현력을 키워보려고 노력하지만 쉽진 않다. 우리가 거저 얻은 모국어도 이러한 노력이 필요한데 외국어는 평생 갈고닦아야 하는 게 당연하다. ‘이것’만 하면 두 달 안에 원어민처럼 말할 수 있는 그런 마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안녕하세요, 브런치 구독자 여러분
지난 20주 동안 틈틈이 작업해 왔던 <내가 영어를 다시 만났을 때>가 드디어 80장 분량의 전자책으로 완성되었어요. 앞으로 여러 플랫폼에서 만나보실 수 있으실 텐데 승인을 기다리는 동안 이렇게 먼저 출간 전 연재로 인사드려요. 2017년 첫 책을 출간했을 때는 편집자님의 전문적인 리드에 따라 마감까지 열심히 글을 써서 보내고 나니 짠 하고 책이 나왔는데, 전자책에 도전해 보니 글 쓰는 게 그 중에 가장 쉬운 일이었네요. 표지 제작, 플랫폼에 입점하기, 홍보하기 등등 혼자서 해야 할 일이 많고 서툰 티가 나기도 하지만 재미있는 도전이라 벌써 그다음 책을 구상하고 있는 중이에요.
성인이 되어서 영어를 다시 만나시는 많은 분들께 제가 사랑한 영어를 편안하게 소개해드리고 싶어요. 책 속 꼭지 중 앞으로 다섯 편 가량을 선정해서 출간 전 연재를 이어나가려고 해요. 다음 편도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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