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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로 시간을 돌려서 다시 살고싶다는 생각을 참 많이 했었다. 때로는 어느 하나의 선택을 후회해서 되돌리고 싶던 적도 있고, 때로는 어느 국면을 통째로 다시 살아가면 어떨까라는 마음으로. 주로 마음먹은 대로 풀리지 않는 내 인생을 후회하는 목적으로 자주 꾸던 망상이다.
외국어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나보다 훨씬 뛰어난 친구들 사이에서 바닥을 박박 길 때, '그냥 얌전히 동네 일반고나 갈걸'이란 후회를 정말이지 매일 했다. 내 인생에서 첫번째 분기점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깊은 상처를 남긴 선택이었다. 그게 아무는데는 몇년이 필요했고. 고3때, 재수때의 1년씩을 온전히 전념한 채로 보내지 못했다는 자책도 나를 꽤 오래 괴롭혔다. 수능 답안지를 미리 쥐고 돌아가는 수준까진 아니더라도, 그 국면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훨씬 열심히 살 수 있을텐데, 시간 낭비하지 않고 알맞은 공부를 할텐데, 라는 아쉬움도 잔상으로 남았고. 그땐 내가 스스로 설정한 정규 루트로 들어가지 못하면 인생이 망가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만큼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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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가 스물둘, 스물셋 정도의 나이로 내 인생을 평가했을 당시의 관점이다. 나는 그 시절의 내 모습이, 가지고 있던 가능성 중 최악의 형태로 뻗어나간 결과물이라고 생각했다. '최악의 나'. 본인을 그렇게 규정지으면 인생이 굉장히 힘들어진다. 뭘 해도 힘이 안 들어가고, 뭔가를 제대로 하려고 시도하고, 실제로 올바른 방향으로 에너지를 쏟아내더라도 항상 마음이 불안하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게 되고, 내 현재의 위치를 곱씹으며 '역시 무언가 잘못됐을거야'라는 패배의식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웬만한 자신감으로는 이 짙은 자기혐오의 그늘에서 탈출할 수 없다. 자기 확신만으로는 벗어날 수 없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려나. 한번 자신의 현재 상황을 밑바닥으로 상정한 사람이, 자신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거기서 빠져나오긴 여간 어려운 게 아니란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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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종일 여의도에서 시달리던 하루, 내게 보상을 주고 싶은 날이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보러 갔는데 말이지. 몽롱한 와중에도 참 많은 생각이 들더라고. 이 영화는 역설적으로 '최악의 나'로부터 시작된다. 더이상 나빠질 수 없을 만큼, 갈림길에서의 선택마다 최악의 최악으로 이어진 결과물. 그런데, 그 최악의 모습에 또다른 가능성들이 비롯된다.
어느 순간부터는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는 생각을 잘 안했다. 일단 내가 나이를 솔찬히 먹었다. 이십대 초중반 이후로 쏟아냈던 그 정열을 다시금 반복할 자신이 없다. 그 과정에서 얻은 약간의 자존감과 자기확신을 새로 가다듬기도 진력이 난다. 몇년의 시간동안 얻은 소중한 사람들과의 인연을 다시 쌓을 자신도 없었다. 온 마음을 내줬던 이들과 백지 상태로 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관계를 형성할 생각을 하면 가슴이 철렁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그들 중 몇몇은 예기치못한 변수로 날 떠나거나, 아예 만나지 못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나는 그 몇년간의 시간을 통해 내게 남은 게 일종의 선물과도 같다고 생각해왔다. 최악의 나를 극복하기 위해 악전고투하는 과정에서, 그래도 세상이 살 만하단 걸 알려주기 위해 안겨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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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거리의 파토스'라는 개념도 오랜만에 떠올려봤다. 무언가를 격렬히 혐오해서, 거리를 두고 싶다는 열망인데.. 여기서 혐오의 대상은, 아니러니하게도 '자기 초극'의 계기를 제공하기도 한다.
생각해본 적 없는 최악의 모습에서 몸부림치던 내가 자꾸 떠올랐던 밤이다. 한참 시간이 흘러 어쩌다가 내가 바라던 모습 중 하나가 돼서는, 영화관에 볼품없이 널브러져 있는 모습이 참 묘하게 느껴졌단 말이지. 칼정장에 무릎까지 내려오는 트렌치 코트를 입고는 혼자 감상에 빠져 청승을 떨고 있는 광경이 말이다.
그런데 말이다, 난 무얼 그렇게까지 혐오했던 걸까. 내가 최악으로 규정했던 그 상황은 무엇 때문에 최악이었던 걸까. 그리고 지금의 나는 최악에서 얼마나 떨어져있나? 글이 점점 길어지고 상념으로 뒤덮여가는 걸 보니 아무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