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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탑건'이라고 부르는 친구들이 간혹 있다. 아주 오래 전부터 날 알고 지낸 이들이다. 이유는 별 건 없고, 내 이메일 아이디에 'topgun'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무려 22년 전에 처음 만든 아이디였는데, 별 이유는 없었다. PC통신에서 ADSL-VDSL로 넘어가던 때였고, 이메일 만들기가 한참 유행하던지라 나도 하나 가지고 싶었거든. 첫 아이디니까 무언가 의미를 가진 걸로 만들고 싶었는데, 내 이름에서 한글자를 따서 붙이려다보니 그렇게 됐다. 아마 내 기억에는 어머니가 불현듯 영화 탑건을 떠올리고, 탑건이 좋겠다고 (그래.. 무려.. 최고의 OO.. 이런거지...) 했던듯 싶지만.
웃긴 사실이지만..난 20년 넘는 세월동안 영화 '탑건'을 보지 않았다. 미국 군대의 우수성을 설파하는 프로파간다에 대한 반감.. 이런 건 전혀 아녔다. 그냥 이상하게 손이 안 갔던거고. 그런데.. 난 보지도 않은 이 영화에 대한 묘한 동경도 기슴 한편에 품고 있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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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쯤, 이원익이라는 청년이 펴냈던 책 <비상>. 당시 저자의 나이가 지금의 내 나이쯤 되겠군. 2000년대에 한창 유행하던, 전도유망한 청년의 성공기를 담은 책이었다.
사실 원래 이런 책은 질색하는 스타일이지만(무려 초등학생 때도 그랬다), 이 책은 굉장히 감명깊었다. 전투기에 열광하던 소년, 아버지처럼 전투기 파일럿을 꿈꿨지만 좌절된 꿈, 그리고 그 꿈을 완전히 놓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쫓아가며 얻어낸 성취.
누가봐도 대단하다고 혀를 내두를만한 이 청년은 영화 탑건을 수백번도 더 보면서 대사까지 달달 외울 정도였다고. 실제로 이 사람의 인생에서 굉장한 의미를 가지는 영화기도 했고, 책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졌던 지라 각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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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탑건이 첫 개봉 36년만에 속편을 내놓은거다. 그 소식을 듣자마지 청년 이원익과 그의 책 <비상>이 먼저 떠오르더라. 그 누구보다 속편의 발표에 진심으로 기뻐할 사람일테니까. 그리고 떠오른 물음. 이원익 씨는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미래의 포부를 얘기하던 이원익 씨는 이제 40대 중후반의 중년이 돼있을 게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중역을 맡은, 무게감 있는 사람으로 나이를 먹었겠지? 그런데 느낌이 이상하더라고. 간절히 바라는 꿈을 가진 사람이, 거기에 닿으려고 달려나갈 때 참 멋있다는 걸 어린 내게 일깨워준 사람이 중년이 돼있을 생각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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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이원익씨의 이름을 모 헤드헌팅 사이트에 검색해봤다. 감상이 와장창 깨질까 조금 걱정을 하면서. 올해부터 굴지의 항공사 한국지사에서 공공 섹터장을 맡게 됐다는 근황을 알 수 있었다. 자서전에도 상당한 분량을 할애해서 설명한 회사로 결국 갔구나.
슬며시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래, 이렇게 한결같은 사람도 있구나 싶고, 뭔가 고맙기도 하고. 제 글답지 않은 훈훈한 결말이지만, 세상에 이런 면도 있다는건 아무래도 좋은 거 아니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