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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tincelle Oct 18. 2022

최악에서 비롯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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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로 시간을 돌려서 다시 살고싶다는 생각을 참 많이 했었다. 때로는 어느 하나의 선택을 후회해서 되돌리고 싶던 적도 있고, 때로는 어느 국면을 통째로 다시 살아가면 어떨까라는 마음으로. 주로 마음먹은 대로 풀리지 않는 내 인생을 후회하는 목적으로 자주 꾸던 망상이다.


외국어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나보다 훨씬 뛰어난 친구들 사이에서 바닥을 박박 길 때, '그냥 얌전히 동네 일반고나 갈걸'이란 후회를 정말이지 매일 했다. 내 인생에서 첫번째 분기점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깊은 상처를 남긴 선택이었다. 그게 아무는데는 몇년이 필요했고. 고3때, 재수때의 1년씩을 온전히 전념한 채로 보내지 못했다는 자책도 나를 꽤 오래 괴롭혔다. 수능 답안지를 미리 쥐고 돌아가는 수준까진 아니더라도, 그 국면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훨씬 열심히 살 수 있을텐데, 시간 낭비하지 않고 알맞은 공부를 할텐데, 라는 아쉬움도 잔상으로 남았고. 그땐 내가 스스로 설정한 정규 루트로 들어가지 못하면 인생이 망가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만큼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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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가 스물둘, 스물셋 정도의 나이로 내 인생을 평가했을 당시의 관점이다. 나는 그 시절의 내 모습이, 가지고 있던 가능성 중 최악의 형태로 뻗어나간 결과물이라고 생각했다. '최악의 나'. 본인을 그렇게 규정지으면 인생이 굉장히 힘들어진다. 뭘 해도 힘이 안 들어가고, 뭔가를 제대로 하려고 시도하고, 실제로 올바른 방향으로 에너지를 쏟아내더라도 항상 마음이 불안하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게 되고, 내 현재의 위치를 곱씹으며 '역시 무언가 잘못됐을거야'라는 패배의식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웬만한 자신감으로는 이 짙은 자기혐오의 그늘에서 탈출할 수 없다. 자기 확신만으로는 벗어날 수 없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려나. 한번 자신의 현재 상황을 밑바닥으로 상정한 사람이, 자신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거기서 빠져나오긴 여간 어려운 게 아니란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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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종일 여의도에서 시달리던 하루, 내게 보상을 주고 싶은 날이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보러 갔는데 말이지. 몽롱한 와중에도 참 많은 생각이 들더라고. 이 영화는 역설적으로 '최악의 나'로부터 시작된다. 더이상 나빠질 수 없을 만큼, 갈림길에서의 선택마다 최악의 최악으로 이어진 결과물. 그런데, 그 최악의 모습에 또다른 가능성들이 비롯된다.


어느 순간부터는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는 생각을 잘 안했다. 일단 내가 나이를 솔찬히 먹었다. 이십대 초중반 이후로 쏟아냈던 그 정열을 다시금 반복할 자신이 없다. 그 과정에서 얻은 약간의 자존감과 자기확신을 새로 가다듬기도 진력이 난다. 몇년의 시간동안 얻은 소중한 사람들과의 인연을 다시 쌓을 자신도 없었다. 온 마음을 내줬던 이들과 백지 상태로 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관계를 형성할 생각을 하면 가슴이 철렁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그들 중 몇몇은 예기치못한 변수로 날 떠나거나, 아예 만나지 못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나는 그 몇년간의 시간을 통해 내게 남은 게 일종의 선물과도 같다고 생각해왔다. 최악의 나를 극복하기 위해 악전고투하는 과정에서, 그래도 세상이 살 만하단 걸 알려주기 위해 안겨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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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거리의 파토스'라는 개념도 오랜만에 떠올려봤다. 무언가를 격렬히 혐오해서, 거리를 두고 싶다는 열망인데.. 여기서 혐오의 대상은, 아니러니하게도 '자기 초극'의 계기를 제공하기도 한다.


생각해본 적 없는 최악의 모습에서 몸부림치던 내가 자꾸 떠올랐던 밤이다. 한참 시간이 흘러 어쩌다가 내가 바라던 모습 중 하나가 돼서는, 영화관에 볼품없이 널브러져 있는 모습이 참 묘하게 느껴졌단 말이지. 칼정장에 무릎까지 내려오는 트렌치 코트를 입고는 혼자 감상에 빠져 청승을 떨고 있는 광경이 말이다.


그런데 말이다,  무얼 그렇게까지 혐오했던 걸까. 내가 최악으로 규정했던  상황은 무엇 때문에 최악이었던 걸까. 그리고 지금의 나는 최악에서 얼마나 떨어져있나? 글이 점점 길어지고 상념으로 뒤덮여가는  보니 아무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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