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한 녀석을 떠올리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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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를 시작하려는 우리는 "그건 해서 뭐하려고 하느냐"는 실용주의자의 질문에 담대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냥 재밌을 것 같아서 하는 거야" "미안해. 나만 재밌어서"라고 말하면 됩니다. 무용한 것이야말로 즐거움의 원천이니까요.
(김영하 산문집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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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무용한 즐거움에 취해있는 한 친구가 있었다. 모두가 좋아하고, 모두를 좋아하는 만인의 연인같은 녀석이었다. 사람들이 웃는 걸 보기 위해 본인을 갈아넣고, 때로는 거기서 스트레스도 느끼던. 그러다가도 결과물을 내놓는 순간 너무나 좋아해주는 사람들을 보면 거기서 더없는 뿌듯함을 느끼는.
가끔은 주제넘는 조언도, 걱정도 했다. 좀더 생산적으로 촘촘하게 시간을 쌓아올리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본인의 꿈과 직결되지 않는데 시간을 쓰는 게 아닌가 싶어서, 괜히 신경쓰이기도 했다. 근데 그녀석은 그런걸 계산하지 않았다. 늘 본인의 마음이 가는대로 가장 즐거울 수 있는 선택을 했다. 그래서 모두가 그 사람을 좋아했다.
각양각색이고, 어떤 면에서는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수십명의 친구들. 한 대학의 동아리에서 만났다는 것 말고는 공통분모가 없는 청년들이 수년째 한가족처럼 지낼 수 있던데는 그런 무용한 즐거움에 취해있는 녀석의 공이 절대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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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부터는 그도 현실의 목소리에 좀더 신경을 쓰기 시작했던 것 같다. 본인이 오랜 시간동안 바라마지 않던 직역이 좀처럼 나타나지 않자, 다른 방향으로 조금 틀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이곳저곳 일자리를 얻기 위해 두드리기도 했었고.
그가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 합격을 앞두고 있을 때, 난 그곳을 고르라고 강력히 권유했다. 쉽게 오지 않는 기회라는 직감이 왔고, 설령 그가 자신의 꿈을 꺾지 않더라도, 다음을 기약하기에 더없이 좋은 정거장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안정적인 정거장보다는 자신의 꿈과 조금더 가까운 곳에 베이스캠프를 차렸다. 한 살씩 나이를 더 먹을 때마다 무겁게 내려앉았을 현실의 무게를 그렇게 덜어냈던 걸까? 나로선 못했을 결정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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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어이 베이스캠프에까지 사직서를 제출하고 새로운 도전에 나섰던 그를 마지막으로 만난 건 며칠 전, 삼각지의 어느 맥주집. 도전의 결과가 나오기 바로 전날 밤이었다. 좋은 결과가 나올 걸로 예상을 하면서도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는 녀석과 술잔을 부딪혔다. 하릴없이 옛날 이야기를 떠올리며, 익숙한 장면들로 합격을 기원했다.
그리고 다음날 오후. 미처 받지 못한 부재중 전화가 한 통 찍혀있었다. 그녀석이었다. 몇몇 장면들이 필름처럼 파바박 스쳐지나갔다. 내 눈시울은 괜히 또 뜨거워졌다. 스스로를 실용주의자라고 생각하는 한 삭막한 인간이, 무용한 즐거움을 집요하게 쫓아다닌 그녀석에게 감화라도 된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무용한 즐거움도 아니었던 것 같긴 하지만 말야.
그가 이제부터 새로운 자리에서 만들어낼 즐거움은 모두를 위한거겠지. 그동안 우리는 뭐 차고 넘치게 즐거웠으니까 아무래도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