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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tincelle Mar 06. 2023

오후만 있던 기치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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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보다 조금더 동쪽에 있는 이 나라는 해가 빨리 진다. 오후 네시 무렵이면 어둑어둑해지고, 다섯시가 다가오면 땅거미가 내려올 정도였다. 이른 오전부터 발걸음을 이리저리 옮겨다녔지만, 하루가 이렇게 빨리 끝나게 되면 조바심이 먼저 인다.


구글맵에서 고른 첫번째 카페는 만석. 아직 한국인들이 좀체 찾아오지 않는 장소지만, 지역민들과 경쟁하는 것도 만만찮다. 도심 한가운데 있는 널찍한 공원을 다시 가로질러 찾아간 다른 카페. 안에서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제대로 된 간판도 없다. 고개를 갸웃하며 삐그덩대는 문을 살포시 밀어본다.


고개를 숙이지 않으면 천장에 머리가 닿을 것만 같은 작은 공간에 테이블들이 들어차있다. 대부분 혼자 앉아있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다. 가게에서 흐르는 소리라곤 큼직한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재즈뿐. 사람들은 테이블마다 놓인 백열등에 의지해 책을 읽거나 노트에 무언가를 적어 내려간다. 이어폰을 꽂아서도, 동영상을 촬영하거나 보아서도 안된다는 이상한 규칙이 메뉴판에 적혀있다. 문을 열고 나가면 공원에서 공을 차고 뛰어노는 아이들이 한가득인데, 이곳은 시간이 멈춘양 고요하다.



손짓으로 블렌드커피와 치즈케익 한조각을 주문한다. 주인 이저씨가 커피를 내리는 소리가 나직나직, 중간중간 탁탁 튀는 시계 초침 소리가 들릴 만큼 밀도높은 공간이다. 이런 분위기를 배반하지 않을 만큼 커피는 훌륭했다. 크리미한 향이 입안을 감돌자 깜짝 놀랄 만큼. 이렇듯 속세와 단절되기 완벽한 환경에서 나도 몽상에 빠져든다. 읽을 것도 , 쓸 것도 가져오지 않은 만큼 어쩔 수 없는 선택지다.


문을 열고 나오니 하늘이 오렌지빛으로 물들어가고있었다. 공원에 있던 아이들은 집에 갈 채비를 한다. 잠깐 눈을 감았다 뜬 것 같은데, 한시간이 스르륵 흘렀다.


일생각을 며칠이라도 덜어보려고 업무용 폰은 로밍도 안해서 오른 여행길이었다. 하지만 디지털 디톡스가 그렇게 간단히 되지는 않았다. 손에서 이 문명의 집약을 떼놓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라니까. 그래서 이날 오후의 고즈넉한 여행이 더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그런 오후만 있던, 어느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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