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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tincelle Oct 17. 2023

재건해야 할 폐허

<여덞 개의 산> , 펠릭스 반 그뢰닝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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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건해야 할 폐허’ 속에서 삶과 죽음을 모두 찾으려 하는 이와, 한발짝 떨어져 바라보는 이의 엇갈린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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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나와서 한줄의 감상은 이렇게 남겨놨다. 그 후로 한참을 되뇌었다. 간만에 무언가를 남기고 싶은데, 무슨 이야기를 해야할까 싶어서.


이 영화의 시계열은 생각보다 긴 흐름을 다룬다. 두 명의 어린 소년이 어른이 되고, 그들이 재건해야 할 ‘폐허’를 보여주기까지 말이다. 장소는 이탈리아 북부, 알프스의 어느 자락에 자리한 마을. 어느 날 두 소년과 그 중 한명의 아버지가 같이 만년설이 뒤덮인 산을 걷는다. 앞서가는 아버지는 선두에 서서, 자신의 허리에 로프를 묶고 아들 피에트로와 마을 소년 브루노가 따라오게 한다. 그런데 여기서 아버지와 직접 로프로 연결돼서 따라오는 건 아들이 아닌 마을 소년 브루노다.


아들 피에트로는 브루노와 연결된 채 힘겹게 걸음을 옮겨낸다. 산을 오르면 오를수록 피에트로는 점점 버겁다. 아버지외 브루노는 꼭 연결돼서 길을 걷지만, 피에트로의 발걸음은 느려지고, 간격은 멀어진다. 세 사람밖에 없는 고원. 두 개의 점이 붙어있는데 한 개의 점만 멀어지는 장면은 기이하다. 아들이 고산병에 지쳐 몸을 가누지 못할 때까지 인지하지 못했던 아버지는, 아들과 영영 멀어진다. 그 날의 고립을 아들은 잊지 못했다. 아버지와 직접 연결되지 못하게 만든, 중간에 끼어있던 브루노에 대한 원망도 가슴 깊이 새겨진다.


서른 살 피에트로는 아버지를 여읜 뒤 다시 산으로 돌아온다. 그토록 증오했던 산 중턱에, 아버지의 유언대로 집을 만들기 위해서. 그리고 그 과정은 어로지 브루노가 이끈다. 청년이 된 두 소년이 서로의 관계를 회복해가면서 집을 짓는 과정은 사뭇 감동적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그렇게 순탄하게 흘러가지 않는다. 자신이 일으켜야 할 삶을 오롯이 산에서만 찾으려는 브루노. 그리고 산에서 일단의 삶을 재건하고, 한발짝 떨어져 관조하는 피에트로. 시간이 흐르고 겨울은 점점 매서워진다. 그리고 맞닿을 듯했던 이들의 삶이 다른 궤적을 따라감은 명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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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트로와 브루노가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스크린이 내려가고도 한참 생각에 빠져있었다.


2005년,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설악산에 갔다. 새벽부터 오색으로 올라가서 대청봉을 찍고, 천불동계곡으로 내려가는 코스였다. 하루만에 종주를 하는거였는데, 지금 하라고 해도 자신이 없는데 13살에게는 상당히 버거웠다. 올라가는거야 최단코스니까 얼떨결에 올라갔는데, 힘이 빠진 상태에서의 하산길이 지옥이었다. 절경이라는 천불동계곡의 장엄한 풍경은 기억도 잘 안 난다. 다리가 너무 아파서 거의 울면서 내려왔던 걸. 비선대가 나오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이상한 오기가 발동해서 부축해주겠다, 업어주겠다는 부모님의 제안을 다 뿌리치고 부득부득 두발로 걸어 내려온 길이었다.


혼자는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고립감이 드는 경험이었다. 산이라는 공간의 특수성때문에 그럴까. 까딱 잘못하다간 완전히 압도될 것 같다는 느낌인 걸까. 잘은 모르겠지만, 그 설산에서 닥쳤을 피에트로의 절망감이 왠지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하더라고. 한계가 왔음을 눈치채고 손을 내민 부모라도 없었다면.. 난 그 한번의 산행으로 산을 마음속 어딘가에 가둬버렸을지도 모르겠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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