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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tincelle Dec 25. 2023

높은 마음

낮은 몸에 갇혀있대도


종종 과거로 기억을 되돌려본다. 두고두고 되뇌는 아픔은 어느 한 구간에 몰려있기 마련이다. 


두번째 수능을 아예 망쳐버리고 절망에 몸부림치던 20살 겨울. 그래도 1년 가까운 시간을 더 노력했는데, 안하느니만 못한 결과가 나왔을 때의 실망감은 작지 않았다. 무력감이라는 표현이 좀더 어울리겠다. 모든 카드가 소진된 후, 매섭게 추운 겨울날 혼자 실내포차에 들어갔다. 매운 칼국수 한그릇에 소주라도 마셔보려고 하니 그렇게는 장사를 안한다고 하더라. 멀쩡한 안주를 시킬 돈은 또 없어서 그냥 뻘쭘하게 집에 들어갔다. 되게 불쌍해보였을텐데 그냥 좀 팔아주지 그랬나 몰라. 


첫해의 실패는 생각보다 괜찮은 면이 있었다. 노브레인의 '나는 재수가 좋아'라든가, 위저의 'Say it ain't so'같은 노래를 들었다. '웃음으로 눈물닦기'같은 해학을 발휘할 여유가 조금은 있던 열아홉의 겨울이었다. 스무살 겨울은 좀 달랐다. 연달아 이어진 실패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10년 넘은 세월이 지난 지금와서 보면 스무살이나 스물한살이나, 1년쯤 더 늦고 말고가 무슨 의미가 있냐 싶지만. 그때는 그만큼 남들보다 뒤쳐진다는 게 너무 무서웠다.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차이가 생긴 것만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뛰어나기 그지없는 중고등학교 친구들은 대학생활도 평범하게 하지 않고 가시적인 성과를 만들어내고 있었거든. 군대조차 다녀오지 않은 상황에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가닥이 잡히지 않았다.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막막한 하루를 이어갔다. 그래도 힘을 짜내어 음악은 계속 들었다. 신문에서 한국대중음악상 특집 기사를 봤다. 9와숫자들의 새 앨범이, 거의 모든 부문에 이름을 올렸다. 고3때 <말해주세요>로 처음 접한 9와숫자들. <유예>라는 앨범을 아이팟에 넣었다. 그리고 그 겨울 내내 몇 번을 들었는지 모르겠다. 


연체되었네 우리 마음은
완전함은 결코 없다고 해도
부족함이 난 더 싫은데
내일 모레 글피 나흘 닷새

유예되었네 우리 꿈들은
유예되었네 우리 꿈들은
유예되었네 우리 꿈들은
유예되었네 우리 꿈들은

9와 숫자들, '유예' 


사실 음악을 들을 때 가사를 그렇게 신경쓰지 않는 편이다. 멜로디가 항상 우선이었고, 앨범 전체의 컨셉을 생각하면 생각했지. 아마 음악을 그 자체로 듣지 못하고, 공부할 때 듣는 BGM 정도로 여겨서 그랬을 지도 모르겠지만. 그런데 난 이 앨범으로 인해 '유예'라는 단어의 의미를 뜯어보게 되었다. 한번도 마음에 새겨본 적이 없던 단어다. 멈춤과 후퇴라는 걸 생각해본적이 없으니, '유예'라는 단어를 주의깊게 볼 새도 없었다. 지치고 너덜너덜해진 마음에 그 단어가 와닿았다. 괜찮으니까 다 잘될거야, 라는 희망의 곡조는 아니었다. 하지만 '유예되었네 우리꿈들은' 이라며 나직히 읊조리는 가사여서 더 좋았다. 담담히 현실을 바라보며 관조하는 느낌이었달까. 현재가 유예되었다는 걸 생각하고, 입으로 말할 수 있다는 것. 그 자체로 내게는 의미가 있었다. 



그로부터 1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죽을만큼 힘들었던 기억은 약간의 생채기만 남고 잘 아물었고, 별 것 아니라고 흐흐 웃어넘길 수 있는 일이 되어버렸다. 그 사이 다른 종류의 슬픔들이 생길 때도 있었지만 비교적 잘 이겨냈다. <유예> 앨범 속의 노래들로부터 종종 위로를 받기도 했고. 



얼마 전, 9와숫자들의 공연을 보러갔다. 날 감정적으로 이렇게 요동치게 한 밴드의 공연을 왜 한번도 보러갈 생각을 하지 않았나 몰라. 어렵게 취소표를 구해 예매를 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마음 한편이 살짝 불안했다. 웃기는 소리같지만, 힘들었던 시절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게 아닐까? 생각이 살짝 들더라고. '눈물바람'이랑 '플라타너스'를 부르면 어떡하지? 진짜 우는거 아니야? 다행히도 걱정했던 노래들은 나오지 않았다. 아쉬운 마음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들의 공연 2시간을 오롯이 함께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벅차올랐다. 



높은 마음으로 살아야지
낮은 몸에 갇혀있대도
평범함에 짓눌린 일상이
사실은 나의 일생이라면

밝은 눈으로 바라볼게
어둠이 더 짙어질수록
인정할 수 없는 모든 게
사실은 세상의 이치라면

9와 숫자들, '높은 마음'


올해도 며칠 남지 않았다. 이번 연말은 '높은 마음'의 가사를 흥얼거리고 있다. 높은 마음으로 살아야지. 가끔 출렁이더라도,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면 될 것 같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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