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 you listen to 'Girl in Re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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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음악에 몰두한 이후 유명 밴드들의 내한공연을 솔찬히도 다녔다. 존 메이어나 U2의 공연을 눈앞에서 본 건 잊히지 못할 경험이다. 꼭 가야 했는데 못간 경우는 라디오헤드, 킬러스, 폴매카트니 정도였으려나? 그것도 입시와 입대라는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예외적이었던 경우고, 눈물을 많이 훔쳤다.
언젠가부턴 해외에 나가 직접 공연을 봐야겠다는 목표도 생겼다. 코로나가 풀린 이후 몇 차례 외국을 나가긴 했지만, 볼 만한 공연도 딱히 없었거니와, 그나마 예약한 일정도 빠그러지는 등 쉽지 않더라.
여름 휴가를 앞두고 각 도시에서 열리는 공연을 점검햐던 중 ‘Girl in red'라는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제법 인지도도 있는 것 같았고, 올해 펜타포트에 와서 했던 무대도 평이 아주 좋았고, 무엇보다 곡이 귀에 쏙쏙 걸렸다. 여러 모로 제격이라고 생각하고 호기롭게 예매를 한 것까진 아무래도 좋았는데.
이 뮤지션이 스스로를 레즈비언이라고 커밍아웃을 한 아이코닉한 존재라는 걸 조금 나중에 알게 됐다. 사실 그것도 내가 개의하는 영역은 결코 아니다. 더군다나 ‘girl in red'는 스스로를 LGBTQ의 대변자로 규정하는 투사형 뮤지션이랑은 거리가 멀었기에 신경이 쓰이는 부분은 결코 아녔다. 그런데...
공연을 기다리는 행렬 속에서 남자 관객을 찾기가 어려웠다. 음악을 찾아가는데 성비가 무슨 상관이겠냐만, 가뜩이나 낯선 나라인데 혼자서 너무 이질적인 존재가 아닌가 싶어 괜스레 움츠러들더라. 온몸을 무지개로 수놓거나, 화려한 장신구들을 치렁치렁 늘어뜨린 관객등을 보자니 더욱 그랬다. 한국에서 1년에 한번씩 보는 퀴어퍼레이드의 모습과 꽤 비슷한 느낌이었거든. 마치 내가 있어서는 안 될 장소에 눈치없이 끼어든 게 아닌가? 라는 생각도 살포시 들면서.
사실 아침부터 암스테르담 교외로 먼 길 여행을 다녀왔에, 다리가 몹시 아파왔다. 뒤에 넉넉히 남은 좌석으로 가서 편하게 앉아서 볼까도 고민이 들었는데, 뭔가 자리를 떠나기가 아까웠다. 열에 들뜬 관객들이 곳곳에서 히트곡 메들리를 하면서, 자체적으로 떼창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잠시 멈췄다가도 누군가 한 소절을 부르면 음파가 커져갔다. 공연을 기다리는 내 마음도 덩달아 고조됐다.
긴 기다림 끝에 등장한 걸인레드의 무대는 음, 훌륭했다. 다소 정적으로 들리는 노래들마저 락페스티벌에 어울릴 만한 뛰어난 에너지레벨을 투사해 불렀다. 펄펄 뛰어다니는 그 열정이 참으로 대단했다. 문제는 관객들의 에너지가 더 넘쳤다는 거다. 곳곳에서 관객들이 실신했다. 이들을 내보내고 응급처치를 하느라 공연이 자주 끊길 정도로 말이다. 와, 공연 중에 쓰러져나가는 관객들은 비틀즈 초창기때나 있던 일이 아녔던가? 다큐멘터리에서나 보던 풍경이었는데.
돌이켜보면 그동안은 세월의 세례 속에 이미 검증된 뮤지션들의 공연만 다녔다. 데뷔한지 최소 10년, 길게는 30-40년 이상 활동을 지속해온. 이처럼 1020들이 울면서 쓰러져나가는 동시대의 인물을 보러 온 적은 없었단 말이지. 자연스레 상상해보게 됐다. 이 인물이 과연 어디까지 성장해나갈 수 있을까?
틱톡에서 ‘Do you listen to Girl in red?' 라는 밈이 돌았단 건 나중에 알았다. 한 여성의 성정체성을 우회적으로 묻는 문장이다. 20대 초반의 마리 울벤 링헤임은 이미 그런 정체성을 대표할 만한 아이콘적 존재가 됐다. 링헤임은 본인의 정체성을 결코 숨기지 않지만, 그것만 가지고 음악을 하는 사람은 아니다. 하고 싶은 말을 음악으로 자연스레 풀어낼 뿐이다. Serotonin, We fell in love in October, deadgirl in the pool .. 입에 착 감기는 멜로디라인까지 자랑하는 곡들을 듣다보니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갔다. 클라이맥스로 고조되는 공연에서 관객들을 향해 달려오는 마리 울벤 링헤임을 보고 나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새로운 시대의 얼굴을,
운좋게 미리 만나고 있는 걸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