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오후 내내 눈이 내렸다. 사무실에 있으면 밖을 볼 일이 많지 않아 (더욱이 흡연도 안하니 나갈 일도 없다.) 퇴근 시간이 되어서야 하얀 이불로 덮힌 바닥을 보고 눈이 왔다갔구나 생각했다.
출퇴근길에 마주하는 눈은 지옥이지만 밤새 내린 눈은 왜이리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걸까. 비는 잠들기 전 혹은 자다가 거세게 몰아치는 소리 덕에 내리고 있구나를 알아차리지만, 포근하게 덮이는 눈은 아침에 창문을 열면서 처음 마주한다.
책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에서 이어령 선생님은 밤새 내린 눈을 ‘아름다운 쿠데타’라고 말한다.
“변화잖아. 하룻밤 사이에 돌연 풍경이 바뀌어버린 거야. 우리가 외국 갔을 때 왜 가슴이 뛰지? 비행기 타고 몇 시간 날아왔더니 다른 세상이 된 거야. 하루하루 똑같던 날들에서, 갑자기 커튼콜 하듯 커튼이 내려왔다 싹 올라가니까 장면이 바뀌어버린 거야. 막이 내렸다 올라가는 건 일생 중에 그렇게 많지 않거든. 외국 여행을 한다든지, 수술했다 마취에서 깨어난다든지…… 그런데 일상에서 유일하게 겪을 수 있는 게 간밤에 내린 눈이라네. 잠자는 사이 세상이 바뀐 거지. 보통 쿠데타가 밤에 일어나잖아. 자고 일어났더니 탱크가 한강을 넘어 세상이 싹 달라진 거야. 밤에 내린 첫눈이 그래. 쿠데타야, 오래 권력을 누리지 않고 바로 사라지는 쿠데타. 오래 있어봐. 눈 녹으면 지옥이지. 곧 사라지니까 그만큼 좋은 거야. 아름다운 쿠데타.”
아름다운 쿠데타. 전혀 어울리지 않을 거 같은 형용사와 명사가 붙었다. 지금은 따뜻한 실내에서 보고 있으니 천국이지만 조금 후 밖에 나가서는 마주쳐야 하니 지옥. 이처럼 기가 막히게 비유하는 단어가 있을까.
삶은 언제나 뻔한 형용사와 명사가 아니라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품사가 붙었을 때 나오는 아이러니가 매력이다.
밤새 내린 눈이 우리를 기분 좋게 만드는 까닭은 이어령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잠든 사이에 세상이 변했기 때문’이다. 꾸준히 시간을 쏟아도 성과가 좀처럼 보이지 않는. 꽤 지루한 과정 속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단번에 변화를 보여준 사건이니까.
요란하게 내리는 비는 하염없이 흘러가지만, 고요하게 내리는 눈은 소복하게 거리 곳곳에 쌓여, 실내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밖으로 불러낸다. 그러니 어쩌면 우리가 나아갈 방향도 밤새 내린 눈처럼 오늘 하루도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더라도 묵묵히 시간을 쌓는 일이 아닐까. 제법 쌓이고 나면 내가 먼저 알아차리기 전에 사람들이 몰려들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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