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봉준 평전을 읽은 후에 동학농민 혁명전적지를 방문하여 그날의 혁명을 상상하고 싶었다. 올해 대학을 간 둘째 아들이 국내 여행을 가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려고 하는데 마땅한 자리가 없다고 했다. 동학농민 혁명전적지 답사 계획을 제공하면 내용을 보고 그에 상응하는 여행 경비를 제공하겠다고 했더니 동의했다. 2019년 8월 2일부터 8월 4일까지 동학농민 혁명유적지 답사를 아내와 함께 했다.
1. 2019년 8월 2일 방학중에는 교장 선생님과 번갈아 근무하는데 교장 선생님이 월 화, 수요일에 근무하고 나는 목, 금요일에 근무한다. 출퇴근 거리가 조금 먼 나를 배려해주시는 교장 선생님이 고맙다. 금요일, 근무일이라서 수요일에 교장 선생님께 전화로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오후 조퇴를 신청하여 아내와 당진으로 향했다. 유전에 의한 큰 아픔을 불굴의 의지로 이겨내고 있는 좋아하는 후배를 먼저 만나서 회포를 푼 후에 본격적인 답사를 하려고 했기 때문에 당진에 자리를 잡은 후배를 보러 당진으로 갔다. 타지의 생활이 아무리 좋아도 옛 터전에서 추억을 함께 한 사람을 만난다는 설렘은 어쩔 수 없었는지 당진으로 가는 중간에 후배가 전화로 몇 시에 도착하는지 물었다. 도착 시간과 숙소를 알려주고 늦지 않게 숙소에 도착했는데 입구에 후배 부부가 벌써 서성거리고 있었다. 간단함 짐을 대충 던져두고 후배 부부를 급히 만났다. 차에서 오늘 일정을 묻길래 없다고 했더니 식사를 하기는 이른 시각이라 당진 근처 가고 싶은 곳을 물었다. 아무 곳이나 가자고 했더니 추사 김정희 고택을 가자고 해서 그렇게 했다. 추사 김정희 선생 고택과 기념관이 예산에 있었는데 30분쯤 걸렸다. 차에서 내렸는데 이글거리며 저무는 한여름의 태양빛이 바늘처럼 피부를 따갑게 찔렀다. 얼른 기념관 안으로 들어갔는데 태양이 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념관을 자세히 살폈다. 지난겨울 제주 수선화를 통해서 추사 김정희 선생을 만난 후 두 번째 만났는데 학문하는 방법이 나의 생각과 일치하여 좋았다. 하지만 글씨에는 매력을 못 느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의 글씨에만 매력을 못 느끼는 것이 아니라 모든 글씨에 대한 생각이 그렇다. 고택은 부엌에 다락이 있는 것 말고는 특이한 것이 없었는데 백송을 처음 보게 되었다. 왠지 모르지만 백송이 끌렸다. 뒤뜰에 있는 것은 그 당시의 것이 아니라서 추사가 청나라 연경에서 씨를 가져와 심은 용궁리 백송을 보러 제법 먼 거리를 뒤처지는 아내와 후배를 제쳐두고 땀을 잔뜩 흘리며 한달음에 달려갔다. 신기한 백송이었다. 지금도 그때 왜 백송에 유달리 관심을 가졌는지 설명할 수 없다.
<예산 용궁리 백송(천연기념물 제106호), 백송은 중국 북부지방이 원산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백송은 우리나라에 몇 그루밖에 없는 희귀한 수종이다. 이 백송은 추사 선생이 25세 때, 자제군관 자격으로 생부 김노경을 따라 청나라 연경(북경)에 다녀오면서 가지고 온 씨를 고조부 김흥경의 묘소 앞에 심은 것이다. 원래 밑에서부터 세 가지로 갈린 수형이었는데, 두 가지는 고사하고 현재는 한 가지만 남아 있다. 수령은 약 200년이며 높이는 약 10m이다. 추사기념관 팸플릿에서>
당진의 참치집에서 후배 부부와 넷이서 저녁을 허겁지겁 먹으면서 옛날의 대학생활을 추억했다. 이야기를 내내 듣고 있던 아내가 "당신이 대학 다닐 때 후배들 먹여 살린다고 고생했네!"라고 해서 "그 덕분에 지금 후배들이 나를 환대해주는 것 같다."라고 했더니 "그 후배들이 형님의 그 고생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겠다."로 후배가 응수했다. "지난 울산 여행에서 후배와 선배가 나를 반긴 것도 그렇고, 오늘 네가 나를 반기는 것도 그 어려운 대학생활의 추억 덕분이어서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나의 성향으로 후배들의 대학생활에 약간의 보탬이 되었고 그 보람이 나에게도 기쁨이었는데 이제 와서 대가 운운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언급하는 자체가 나를 초라하게 만드는 곤댓짓이다. 근처 주점에서 한 잔 더하고 또 더 한 잔 하자는 후배를 밀어내고 비교적 일찍 잤다.
2. 2019년 8월 3일 눈을 뜨니 아내가 아침에 후배하고 밥 먹기로 했는데 어쩔 생각이냐고 물었다. 더 이상 신세지는 것이 부담스러워 공주 가는 길에 밥 먹도록 하고 씻는 대로 출발하자고 했다. 숙소를 막 나왔는데 후배가 숙소 앞 도로에 기다리고 있으니 해장국집에 가자는 전화가 왔다. 그냥 가는 게 좋겠다고 했더니 어제 헤어지면서 아침에 아내가 맛있는 해장국을 사기로 했는데 가면 안되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아내를 쳐다보니 어제 한 이야기가 막 생각난 인상으로 이었다. 후배가 있는 곳으로 가니 일찍 일어나서 약속한 일곱 시까지 기다리느라 힘들었는데 그렇게 가면 어떡하냐고 나무랐다.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데, 아는 지인이 강원도 옥수수를 보내왔다면서 강원도 옥수수와 제주 소주 미니어처를 차에 실었다. 고맙다며 그냥 받았다. 아내가 사 주는 해장국을 맛있게 먹고 어설프게 헤어졌다. 이렇게 헤어지는 기분이 싫어서 먼저 가려했는데 어찌 되었건 또 어정쩡한 찜찜한 마음으로 헤어졌다. 공주 우금티 전적지를 가는 중에 면천읍성과 마곡사를 들러기로 했다. 이번 답사는 고속도로는 자제하고 국도를 이용하다가 들리고 싶은 곳이 발견되면 추가하기로 했다.
면천읍성은 상상하던 곳과는 너무나 달랐다. 아들이 조사한 내용은 맞지만 유지와 보전은 너무 허술했다. 천연기념물인 오래된 은행나무도 잡풀이 우거진 옛 면천초등학교 가장자리에 있어서 모기가 많았다. 그냥 쳐다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동학길의 푯말로 동학농민 혁명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정비계획이 있다고 하니 빨리 정비되어서 좋은 좋은 문화재가 좋은 인상을 남기면 좋겠다. 면천 막걸리가 유명하다 하여 양조장에 갔더니 소매로는 안 파니 슈퍼를 이용하라고 했다. 향교를 비롯하여 주변에 볼거리가 있었지만 답사의 목적을 살리기 위해 시간을 단축할 필요가 있어서 양조장에서 차를 돌려 나오는데 군자정을 만났다. 골정지의 가운데에 있는 정자인데 연꽃과 어우러져 운치가 있었다.
골정지와 군자정
날씨가 하도 더워서 공용 주차장에 차를 세우지 않고 마곡사를 바로 향했는데 중간에 통제를 하는 것 같아서 중간의 적당한 곳에 차를 세워두고 아내와 걸었다. 땀이 많이 나고 햇빛이 따가웠지만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곳이라는 큰 기대로 생각보다 짜증이 나지 않았다. 차분히 살펴보았는데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김구 선생님이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함 일본인 장교를 죽인 후 수감되었던 인천 형무소를 탈옥하여 승려로 가장하여 숨어서 지낸 곳이라는 것을 알았다. 백범 김구 일기와 평전을 통해서 알고 있을 법했는데 예상치 못하게 흔적을 발견하니 기분이 좋았다. 풍경은 잘 찍지만 내가 나오는 사진을 잘 찍지 않는데 오늘 같은 날은 먼 훗날 아내와 추억하기 위해 함께 찍는다. 마땅히 카메라를 맡길 이들이 없어서 그늘에 앉아 있는 어르신들이 고급 DSLR을 가지고 있어서 정중하게 셔터를 눌러달라고 부탁했더니 작가라고 뻐긴다. 기분이 상했지만 영광이라며 다시 한번 더 정중하게 부탁을 했는데 가만히 앉아서 역광으로 사진을 찍었다. 작가라는 사람이 사진의 기본도 모르다니. 심히 언짢았다. 나이가 들면 겸손이 필수인데 나는 안 그래야 되겠다고 다짐했다.
마곡사
백범당
밝기를 최대한 보정했는데도 얼굴이 어둡다. 자칭 작가가 찍은 사진이다.
공주 우금티로 달렸다. 국도지만 나쁘지 않았고 고속도로처럼 연결이 참 좋아서 편했다. 더운 여름 풍경을 시원한 차 안에서 감상하는 재미도 있었다.
김제 벽골제가 눈에 확 들어왔다. 아내에게 의향을 물어니 들어가 보자고 했다. 입구를 찾았는데 닫혀 있었다. 어떠한 안내판도 없었다. 다른 입구가 있는가 싶어서 차를 타고 돌았는데 없었다. 내친김에 더 돌아보자 싶어서 좀 크게 돌다 보니 김제평야의 농로까지 진출하고 말았다. 더 넓은 평야 가운데에서 초록에 둘러싸여 점프하는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장렬하는 태양에 맞설 엄두가 나지 않았다. 용과 수동펌프 조형을 지나치며 가을 들녘에서 펼쳐질 지평선축제를 상상했다.
우금티에 도착하여 전적비에 묵념을 올리고 왼쪽 길로 전적지에 올랐다. 한여름의 녹음에 볼품없는 장승과 등산로를 알리는 푯말 말고는 별다른 안내가 없었다. 아내와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키며 관군과 동학농민군들의 전투를 상상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휑한 유적지가 동학농민혁명의 평가를 대변하는 것 같아서 쓸쓸했다.
공주 산성시장에서 아들이 추천한 분식을 먹었는데 그다지 썩.
동학혁명군 위령탑
우금티 전투 전적지
만석보 터에 도착하니 동네 주민 몇 분이 등나무 아래에서 더위를 식히면서 전화를 하고 있었는데 말이 참 걸쭉했다. 만석보에 대한 설명과 만석보 터를 알리는 비와 조감도가 있었는데, 조감도는 내용은 알 수 있었지만 빛에 바래져 있었다. 동진강이 태인천과 정읍천으로 갈라지기 전에 설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배들평야의 풍경은 시원한데 햇빛에 데워진 공기는 찜통과 같았다.
이런 더위에 우리 말고 올 사람이 있을까라고 생각했는데 우리가 떠날 때쯤 답사를 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만석보 유지비(萬石洑遺址碑)
만석보는 동진강이 태인천과 정읍천으로 갈라지기 전에 설치되었다.
빛 바래기 전의 조감도
만석보 맞은편에 설치된 양성우 시인의 만석보 시비
만석보
양성우
"들리는가, 친구여.
갑오년 흰 눈 쌓인 고부 들판에
성난 아비들의 두런거리는 소리,
만석보 허무는 소리가
들리는가, 그대 지금도.
그 새벽 동진강 머리 짙은 안갯속에
푸른 죽창 불끈 쥐고 횃불 흔들며
아비들은 몰려갔다.
굽은 논둑길로."
1
그때 그 아비들은 말하지 못했다.
어둠을 어둠이라고 말하지 못하고
아픔을 아픔이라고 말하지 못했다.
본 것을 보았다고 말하지 못하고
들은 것도 들었다고
말하지 못했다.
날 저문 남의 땅, 황토 언덕 위에
눈물뿐인 오목가슴 주먹으로 치며
달을 보고 울었다. 그때 그 아비들,
가을걷이 끝난 허허벌판에
반벙어리 다 죽은 허수아비로
굶주려도 굶주림을 말하지 못하고
억울해도 억울하다고
말하지 못했다.
2
열이면 열, 백이면 백
주눅 들고
천이 면 천, 만이면 만
주눅 들어서
죽은 땅이 꺼지도록
한숨만 쉬고,
빌어먹을 이놈의 세상
밤 도망이라도 칠까?
열이면 열, 백이면 백
한숨만 쉬었다.
3
제 똥 싸서 제 거름 주고
제가 거둔 곡식은 제 것이 아니었다.
차라리 오뉴월이면
송장 메뚜기라도 잡아먹지.
오동지 섣달 길고 긴 밤,
그 허기진 배
오죽했으리.
모진 목숨이 원수였고
조병갑이 원수였다.
4
이방 포졸 떴다 하면
닭 잡고 개 잡아라.
쑥죽 먹는 신세라도
사또 조상 송덕비 세워주고,
사또 에미 죽었으니
조의금 천 냥을 어서 내라.
못살겠네, 못살겠네,
보리쌀 한 톨이 없어도
억새풀 묵은 밭
천수답 다랭이 물세를 내고,
죽자사자 낸 물세를
또 내고 또 내라고 하고,
못 내면 끌려가서
죽도록 얻어맞고.
5
아아, 전창혁이 곤장 맞아
죽던 날 밤엔
만석보 긴 둑에 무릎 꿇고 앉아
하늘에 빌었다. 고부 장내리 사람들.
차라리 마을마다
통문이나 돌릴까?
이 야윈 가슴팍에 비수를
꽂을까?
아비들은 주먹으로 허공을 가르고,
아아, 전창혁이 곤장 맞아
죽던 날 밤엔
피눈물만 있었다. 그 산비탈.
6
밤은 밤으로만 남아 있었고
칼은 칼로만 남아 있었다.
겉늙은 전라도 굽이굽이에
굶주림은 굶주림으로만
남아 있었고
증오는 증오로만 남아 있었다.
먼지 낀 마루 위에 아이들은 앓고
신음소리 가득히 그릇에 넘쳤나니,
오라, 장돌뱅이.
어둠 타고 오라.
나무껍질 풀뿌리로 살아남아서
장성 갈재 훌쩍 넘어
서둘러 오라.
맞아죽은 아비 무덤 두 손으로 치며
전봉준은 소리 죽여 가슴으로 울고,
분노는 분노로만 남아 있었고
솔바람소리는 솔바람소리로만
남아 있었다.
7
구태여 손짓하며 말하지 않아도
누구누구 그 이름을
말하지 않아도
아는 사람은 알았다.
그 손님들을.
찬바람 서릿길 깊은 밤이면
썩은새 감나무집 작은 봉창에
상투머리 그림자도
몇몇이던가를.
구태여 손짓하며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은 알았다, 아이들까지도.
김도삼이, 정익서, 그리고 앉은뱅이,
두루마기 펄럭이며
왔다가 가고,
그 밤이면 개들이 짖지 않았다.
개들도 죽은 듯이
짖지 않았다.
8
장날이 되어야 얼굴이나 볼까?
평생을 서러움에 찌든 사람들.
찰밥 한 줌 못 짓는
무지렁이 대보름,
진눈깨비 내리는 대목장터에
큰바람이 불었다. 쇠전머리에.
났네, 났어. 난리가 났어.
에이 참, 잘 되었지.
때가 차고 부스럼딱지 개버짐 피었으니,
가자 가자 용천배기,
손뼉치며 가자.
김제 태인 알렸느냐?
최경선이를 불렀느냐?
지푸라기 날리는 저녁장터에
으스름 보름달 서럽게 밟고
낫 갈아 아비들은 침대를 찍었다.
9
드디어 때가 찼으니,
증오를 증오로 갚기 위하여
온몸에 불타는 피, 아우성치며
아비들은 몰려갔다. 안개 낀 새벽.
해묵은 피고름 비로소 터지고
증오를 오히려 증오로 갚기 위하여
아비들은 몰려갔다.
살얼음 거친 들판
꽝꽝 울리며,
나무껍질 풀뿌리로 살아남아서
그 겨울 노령남북 모여든 아비,
아비들은 몰려갔다. 곰배팔이도.
눈비바람 칼날같이 몰아칠지라도
그 누가 무단히 죽어간다더냐?
동트는 고부읍내 천둥번개로
두둥둥 북치고 꽹과리치고
온몸에 불타는 피, 아우성치며
아비들은 몰려갔다.
꽹과리치고.
10
보아라. 말발굽소리 크게 울리며
흰말 타고 달려오는
전봉준을 보아라.
남은 처자 불쌍하여 눈 못 감고 죽은
만 사람의 붉은 피
두 손에 움켜쥐고
어이어이 말잔등 찬바람 뚫고
한걸음에 여기 왔다.
이노옴, 조병갑아.
11
자네, 손화중이 동문으로 가고
자네, 김개남이 남문으로 가게.
한 번 지른 함성으로 삼문이 부서지고
또 한 번 지른 함성으로
동헌 지붕이 불에 탔다.
창고문을 열어라.
감옥문을 부숴라.
조병갑이를 놓치지 마라.
갈기갈기 찢으리라.
죽창이 없으면 괭이로 찍고
몽둥이가 없으면 발로 밟으리라.
자네, 김개남이 앞뜰로 가고
자네, 손화중이 뒤뜰로 가게.
12
앉은뱅이 이빨 물고 치는 북소리,
고부산천 회오리치며 크게 울렸나니,
여우 같은 조병갑이 옷 바꿔 입고
어디론가 흔적 없이 뺑소니치고,
분바른 계집들 후들후들 떨며
목숨을 빌었다.
맨땅에 엎드려.
13
이제 와서 그 흙탕물
어찌 두고 보랴.
원한 쌓인 만석보 삽으로 찍으며
여러 사람이 한 사람처럼
소리소리쳤다.
만석보를 허물어라.
만석보를 허물어라.
터진 봇둑 밀치며 핏물이 흐르고.
여러 사람이 한 사람처럼
얼싸안고 울었다.
14
차라리 노래보다
몸부림으로
그 한나절 용천배기
어깨춤 추고,
어절씨구 곰배팔이
곰배춤 추며,
어절씨구 어절씨구
곰배춤 추며.
15
허허, 이게 참으로 몇 해 만인가?
한쪽에선 가마솥에 흰밥을 찌고
한쪽에선 만석보 허물고 온 이야기,
조병갑이 허겁지겁 도망친 이야기로
모두들 오랜만에 신명이 났다.
허허, 이게 참으로
몇 해 만인가?
한쪽에선 가마솥에
흰밥을 찌고.
16
이윽고 산마루에 큰 달이 뜨니,
해묵은 어둔 밤을 비로소
끝내기 위하여 아비들은
빼앗은 관청마당 높은 담장 밑에
날선 죽창 세워 두고
모닥불 쬐며,
아이들이 부르는
청승맞은 노래를 들었다.
"가보세 가보세.
을미적 을미적
병신 되면 못 가리."
근처 예동마을에 만석보 혁파 선정비와 동학농민혁명 최초 봉기 상징조형물이 있었다. 선정비 바로 앞의 경로당에는 마을 어르신들의 웃는 소리가 떠나지 않았고, 선정비 주변에 널어놓은 붉은 고추의 매캐한 냄새가 아스팔트에 데워진 공기와 섞여 불쾌했다. 어떤 어르신이 이 더운 날에 선정비를 읽고 있는 우리가 신기한 듯 물끄러미 쳐다보셨다.
말목장터와 감나무 유적지로 향했다. 짧은 이동 중에 아내가 둘째 아들이 꼼꼼하게 잘 계획했다고 칭찬을 했다. 돈만 받으려고 대충 할 수 있는데 유적지 하나 빠뜨리지 않고 동선과 이동 시간까지 상세히 조사했고 맛집도 빠뜨리지 않았다.
이평 종합복지관 앞에 있는 말목장터 유지비는 주변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고, 아니 주변이 어울리지 않았고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글귀를 읽기 위해 가까이 가는 것이 힘들었다.
1994년 동학혁명 100주년을 맞아 이평 유지들의 모임인 삼오회(三五會)가 주축이 되어 만든 것으로 원래 '말목장터와 감나무' 옆에 있었으나 2002년 7월 그곳으로부터 약 70m 떨어진 현재의 위치에 원형대로 이건 하였다. 정자의 이름은 원래는 삼강오륜에서 따온 '三五亭'이었으나 항의가 거세자 '말목정'으로 고쳤다고 한다.
말목장터와 감나무를 알리는 안내판은 누가 버린 소파와 그 주변의 쓰레기로 인하여 큰 불쾌감을 주었다. 쓰레기 상태를 보았을 때 낮에는 어른들이, 밤에는 아이들이 상습적으로 모여서 회포를 푸는 장소인 듯했다. 1초만 생각해도 그렇게 하면 안 되고 오히려 외지인이 무의식적으로 불손한 행동을 하면 따끔하게 충고해야 될 사람들이 아니던가? 이렇게 하면서 동학농민혁명의 고장이고 후손들이라고 감히 주장할 수 있겠는가? 안타깝고 안타깝다.
감나무가 2003년 태풍 매미로 쓰러져 고사했다고 하지만 어떤 향토 사학자의 주장에 의하면 말목정을 감나무 옆에 세우면서 콘크리트와 공사에 의한 부주의로 감나무가 많이 상했었는데 결정적으로 태풍에 의해 고사되었다고 한다.
전라북도 기념물로 지정할 당시인 2001년에 감나무는 수령 180여 년, 높이 21 m, 밑둘레 2.4m였으며 주민들은 이 감나무를 동학농민혁명의 상징물로 소중히 여기며 감을 따지 않고 보호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었다고 하는데, 왜 콘크리트의 거대한 정자를 역사적으로 소중한 감나무 바로 옆에 세웠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서 고사한 감나무를 보았는데 그날의 비장함은 살아나지 않았고 새카만 색깔이 안타까움만 전해주고 있었다. 사진으로 남기기 싫었다.
답사하기 전에는 감나무 아래에서 아내와 그날의 비장함을 흉내라고 내보고 싶었는데 서운한 마음을 남기고 전봉준 유적으로 갔다.
유적에 막 도착했을 때부터 멀리서 천둥이 쳤다. 반가운 소나기가 오려나 기대를 했는데 유적을 떠날 무렵에 소나기가거세게 내렸다. 순식간에 열기가 사라졌다. 전봉준 선생 고택으로 소개되는 곳도 있지만 복원한 것이어서 정읍 전봉준 유적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복원된 전봉준 옛집
옛집은 조선 고종 15년(1878)에 세워졌다. 앞면 4칸·옆면 1칸의 초가집으로 안채가 구성된 남향집이다. 동쪽부터 부엌·큰방·윗방·끝방 순서의 일(一) 자 형태로 구성되어 있는데, 우리나라 남부지역 민가 구조와는 다른 방향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방명록을 넘겨보니 최근까지 꽤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다. 무겁고 가벼운 글들로 다녀간 이들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우리의 마음을 담은 짧은 글을 남기고, 들어올 때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쉽게 볼 수 있는 작은 소나무 숲의 단소를 찾아 묵념을 했다. 선생의 가묘가 있고 후손들이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황토현 전적지에는 기념관, 제민당, 전봉준 장군 동상, 구민사로 되어 있는데 기념관, 제민당은 신발을 벗고 올라가서 관람을 하는 형태로 되어 있어 불편했는데 이날은 방문객이 없었는지 열기로 가득하여 들어갈 수가 없었다. 방문객이 없는 전적지의 쓸쓸함을 지는 해의 그림자가 더했다.
전적지 전경
전봉준 장군 동상
황토현 전적지 정화 기념비
맞은편에 있는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은 동학농민 혁명을 전체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었다. 어린이 전시실, 동학농민 서적으로 가득 찬 녹두 학당, 특별전, 조선사회 모습 등을 상세히 잘 설명하고 있었다. 동학농민혁명 기념재단에서 전라북도로부터 위탁받아 운영하고 있는데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 등록 신청을 받고 있었다. 특별전으로 참여자들이 그 당시 가족들에게 전하는 글들을 전시하고 있었는데 먹먹했다. 카메라 배터리가 다되어서 많은 사진을 찍지 못했다.
동학농민혁명기념관
동학농민혁명 전적지를 효율적으로 답사하기 위해서는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을 제일 먼저 방문한 후에 정읍을 거쳐 공주에서 마무리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들이 정읍 맛집을 추천했는데 숙소를 잘못 예약하여 김제시 금산면 원평리 근처의 모텔에서 자게 되었다. 취소를 하려니 환불이 되지 않아서 취소는 하지 않기로 하고 정읍 맛집을 거쳐서 숙소로 가느냐, 숙소에서 짐을 풀어놓고 정읍 맛집으로 오느냐를 고민했다. 막걸리가 꼭 먹고 싶어서 일단 숙소로 가서 상황을 보고 결정하자고 했다.
그런데 숙소가 정읍과는 꽤 떨어져 있어서 가기가 싫었다. 원평 맛집을 검색하니 숙소와 1km 안쪽의 거리에 좋아하는 순대집이 있어서 해가 떨어질 즈음에 걸어서 갔다. 멀리서 보니 간판이 낡아서 장사를 하면 좋겠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반전이 일어났다. 유명한 맛집이었다. 사람들로 가득했다. 정말 순대가 맛있었다. 달리 표현을 할 수 없다. 순대와 막걸리 두 병으로 기분이 좋아졌을 때 원평리를 둘러보기로 했다. 가볍게 나선 발걸음으로 집강소와 동학농민 전적지, 시장터를 볼 수 있어서 정말 좋았다. 특히 집강소는 관아에만 설치된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카메라를 가져가지 않아서 맛있는 순대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3.1 운동 기념비
이번 답사로 동학농민혁명 전적지와 3.1 운동 터가 일치하는 것을 발견했다. 원평만이 아니라 다른 지역도 그랬다. 우국충절의 고장이 따로 있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상 동학농민혁명 전적지 답사는 마무리되었다.
3. 2019년 8월 4일
천천히 일어나서 어제 먹은 순대집의 1호점에 가서 나는 순댓국 아내는 순두부를 먹었는데 맛이 좋았다. 뜨거운 태양과 함께 금산사로 갔는데 공용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걸었다. 다행히 그늘진 길이라 힘들지는 않았지만 흐르는 땀은 어쩔 수 없었다. 입구의 시원한 인공폭포도 그다지 시원함을 주지 못했다. 금산사 관련 행사, 불교 행사, 템플스테이로 복잡했다.
금산사 전경
한 여름의 산사
국도의 연결이 좋아서 편안하게 바깥을 구경하며 운전을 했다. 힘들지 않게 함양 상림에 도착하여 카페라테와 빵으로 점심을 대충 먹고 여름의 상림 숲을 걷고 연꽃 사진으로 2박 3일의 답사를 마무리했다.
함양 상림의 연꽃
유익한 답사 여행이었다.
답사 여행에 대한 아쉬움은 전혀 없지만 20년 전 이순신 장군 해전 지를 답사한 적이 있다. 자료 제작을 위해 여러 번 나누어 실시했는데 그때에도 전적지와 유적, 문화재 관리상태가 좋지 않았다. 어떤 곳은 접근이 어려웠고 심지어 찾기도 힘들었다. 이번에도 똑같다. 기념관을 제외하면 어느 곳 하나 제대로 관리되고 있지 않았다. 제대로 관리하지 않는 행정기관 탓도 있지만 주민들의 보존 의지와 관심이 많이 필요함을 느꼈다. 웅장하게 가식적으로 보존하자고 주장하지 않는다. 전적지와 유적, 문화재와 어울리게 주변을 소박하게 정비만 해도 비장함과 숙연함이 살아날 것 같았다.
어느 길 근처에서 문학관을 보았는데 내년 여름에는 아내와 문학관 기행을 하고 싶다. 어느 더운 여름날 시원한 문학관을 방문하여 책 한 권 읽고 다음 문학관으로 이동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절로 웃음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