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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성 Feb 12. 2020

미야자키 하야오가 선물한 어른들의 동화 <붉은 돼지>

미야자키 하야오의 <붉은 돼지>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자전적 영화다. 마르코 파곳은 돼지다. 그는 돼지로 살아가며 현상금 사냥꾼이다. 이 작품에서 눈여겨 볼만한 것은 마르코 파곳이 왜 돼지가 되었는지, 그리고 극중 마지막에 어떻게 돼지가 되는 마법에서 풀리는지 정확한 실마리를 주지 않는다. 그러나, <붉은 돼지>에서 마르코 파곳이 어떻게 돼지가 되었는지 그리고 마법이 풀렸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마르코 파곳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자전적 인물이며 그가 과거 일본의 군국주의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그리고 자신은 어떤 삶을 선택하겠냐는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영화를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1차 세계대전과 파시즘


마르코 파곳은 이탈리아의 군인이었다. 그는 이탈리아가 파시즘의 길을 걷는 모습을 바라보며 환멸을 느꼈다고 생각한다. 파시즘은 1919년 기존의 좌파와 보수파에 환멸을 느낀 대중과 초민족주 즉 자신의 민족만이 최고라는 이데올로기의 결합을 통해 나타난 괴물이다. 아무리 파시즘이 포퓰리즘적인 슬로건을 가지고 나타났지만 어떤 운동이던 기존의 엘리트층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 크게 성장을 할 수 없다. 무솔리니와 히틀러는 자신의 힘을 키우기 위한 필요와 우파 즉 자본가들이 좌파의 행동을 저지하기 위한 필요가 함께 맞아 서로 손을 잡게 된다. 특히, 이 시대에는 우파의 헤게모니인 자유주의가 무너지기 시작한 시기다. 파시즘이 시작된 것은 파시스트들과 자본가가 서로 힘을 합쳤기 때문이다. 파시스트들이 득세를 하게 되고 국가는 괴물이 되어 버린다. 파시스트들이 독재를 시작한 시기에 개인은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오로지, 독재자가 생각한 공익이 선이 되며, 진리가 되는 사회가 도래한 것이다.  개인은 국가를 위해 희생하고 자신이 원하지 않는 전쟁을 펼쳐야 하는 상황에 떠밀리게 된다. 영국의 작가 조지 오웰은 그의 삶의 평생동안 전체주의와 싸움을 했는데, 그는 전체주의가 한 개인의 의사를 존중하지 않고 자신을 몰아붙여 자신이 원하지 않는 행동을 하게 만드는 전체주의의 그 속성에 환멸을 느꼈었다. 이처럼 마르코 파곳 또한 자신이 원하지 않는 상황에서 전쟁 영웅이 되었지만 그곳에서 마르코  파곳은 전쟁의 잔인성에 대해 환멸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돼지가 되었는가?



돼지의 도덕성과 잔인한 세상


It is better to be a human dissatsfied than a pig satisfied; better to be Socrats dissatisfied than a fool satisfied. And if the fool, or the pig, are of a different opinion, it is because they only know their own side of the question. The other party to the comparison knows both sides.  <공리주의론, 존스튜어트 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겠다'라는 이 말은 <자유론>을 쓴 존 스튜어트 밀의 말을 축약한 것이다. 벤담이 공리주의를 만들었다면 밀은 쾌락(행복)을 두 가지로 나누었다. 물질적 행복과 정신적 행복으로 말이다. 마르코 파곳은 영화 내내 개인의 도덕성을 중시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마르코 파곳이 돼지가 된 것은 이 세상이 도덕적 인간이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잔인하고 개인의 도덕성을 무너트리면서 잔인한 행동, 광적인 행동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도덕적 인간인 마르코 파곳에게 세상의 파시즘에 빠진 인간들은 밀이 말하는 돼지보다 못한 존재들로 보였을 것이다. 인간의 잔인성에 실망을 한 마르코 파곳은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보다 돼지로 살아가는 삶이 더 행복해 보인다. 마르코 파곳은 전체주의 국가를 피해 자신의 도덕성을 지키기 위해서 무인도에 숨어 지낸다. 하지만, 세상을 피해 은둔의 삶을 살아가는 돼지는 자신의 도덕을 지키며 살아가기 보다는 현상금 사냥꾼이 되어 돈을 받고 일을 하는 삶을 살아간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한 도덕성을 중시하는 개인을 돼지로 만들어 버렸다. 돼지는 서양에서 탐욕의 화신이며 저급한 쾌락을 중시하는 동물이다. 마르코 파곳은 도덕성을 지키기 위해 돼지라는 탐욕의 화신이 되어 버렸다. 바로 이것이 아이러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마르코를 돼지로 만들어 버리면서 개인의 도덕성만을 고집하는 한 개인이 어떻게 보면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인물일 수 있다는 것은 은연중에 보여주는 것이다. 파시즘의 핵심은 국가가 생각하는 것이 곧 국가의 공익이 되고 자신만이 선의의 심판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돼지인 마르코 파곳과 닮아있다. 마르코 또한 자신의 도덕성만이 옳고 그것이 선이라고 생각하며 모든 것을 판단한다. 즉, 마르코는 파시즘을 그토록 증오했지만 탐욕스러운 돼지가 되고 나서 자신 또한 파시즘적인 성향을 보이는 것이다.



피오 피콜로가 보여준 사랑


자신의 삶에만 치중하는 돼지에게 인간의 아름다움을 보여준 것은 바로 피오 피콜로다. 피오는 미야자키 하야오에 스트레오 타입처럼 등장하는 여주인공의 대담성과 말괄량이 성향을 가지고 있다. 피오는 마르코 파곳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돼지를 좋아한다. 그녀는 <붉은 돼지>에서 마르코에게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을 던지는 인물이다. 마르코는 오로지 개인의 도덕성을 위해 살아가지만 인간을 사랑하지 않고, 자신의 어린 시절 친구인 마담 지나에게 다가가지도 못한다. 마르코가 피오를 이성으로 사랑한 것은 아니지만 그녀를 보면서 자신의 딸처럼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마르코 파곳은 피오를 통해 인간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는 광기에 휩싸인 국가에 충성하는 인간이나 오로지 자신의 도덕성을 지키기 위해 은둔하는 인간 모두 이기적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며 누군가를 사랑하며 희생하는 삶이 인간의 삶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 같다. 즉, 그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추악한 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세상에 그 추악함을 이겨내고 사랑할 수 있는 존재 또한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이탈리아 공군이 사람들을 위협하자 사람들을 피난시키고 자신은 미국인 조종사와 남아 그들과 싸움을 하는 것으로 끝이난다. 그때 돼지는 돼지가 아니라 인간으로 변하게 된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보여준 어른을 위한 동화 <붉은 돼지>


글이 파시즘과 개인의 도덕성 그리고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거창하게 써놓았지만, <붉은 돼지>는 우리 시대에도 적용이 가능한 영화다. 우리는 지금 국가에 열광하며, 종교에 열광하며, 스타들에게 열광하며 개인의 삶의 가치를 거대한 것에서 찾는 경향이 있다. 또한, 다른 한면으로는 어린시절의 순수한 꿈을 버리고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조용하게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기도 한다. 우리 시대에 희생과 사랑은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 또한 들기도 한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붉은 돼지>를 통해 우리에게도 다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우리는 모두 꿈을 가지고 아름다운 상상을 하며 나이를 먹는다. 그러나, 세상의 풍파에 흔들리고 현실의 벽 앞에서 우리는 점점 우리의 순수했던 열정과 꿈을 망각해 버린다. 하지만, <붉은 돼지>의 마르코를 통해 우리는 중년 또한 다시 하늘을 날고 잃어버렸던 자신을 찾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 뭔가, 행복해 보이기도 하지만 슬픈 영화다. <붉은 돼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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