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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성 Dec 18. 2019

훈민정음 때문에 하늘로 가버린 영화 천문:하늘에 묻는다

천문 : 하늘에 묻는다


스포가 있으니 영화 관람 후 보세용


    <천문 : 하늘에 묻는다>는 성군으로 알려진 세종대왕과 노비 출신의 장영실을 중심으로 하는 영화다. 이 영화가 재밌는 점은 예전에 <뿌리 깊은 나무>의 세종대왕 역을 맡았던 한석규가 <천문 : 하늘에 묻는다>의 세종 대왕과 같은 역할을 연기한다는 점이다. <뿌리 깊은 나무>는 한글 창제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세종 대왕과 가상의 주인공 강채윤 그리고 밀본이라는 정도전의 후예들과의 갈등을 주된 소재로 극을 끌어 간다. <뿌리 깊은 나무>는 재상 중심 정치 사상을 외치는 밀본과 왕이 다스리는 국가를 원하는 세종이 훈민정음의 반포를 사이에 두고 갈등하는 구조를 흥미진진하게 꾸며냈다. <천문 : 하늘에 묻는다>가 흥행에 성공하려면 <뿌리 깊은 나무>와 차이점을 보여야 한다. 그 이유는 한석규라는 배우가 이미 <뿌리 깊은 나무>에서 세종 대왕의 역을 맡았기 때문이다.


제일 높은 곳에 있는 자와 제일 낮은 곳에 고개 숙인 자의 만남


    <천문 : 하늘에 묻는다>에서 세종 대왕은 늙고 병들었다. 왼쪽 눈이 붉게 터지고 흰 머리가 많은 세종의 모습은 <뿌리 깊은 나무>에서 젊고 패기 넘치며 '지랄하고 자빠졌네'를 외치던 세종과 사뭇 다른 모습이다. <천문 : 하늘에 묻는다>의 세종은 왕으로서의 세종대왕이 아니라 인간 이도의 모습이 잘 나타난다. 사실 많은 매체에서 세종대왕은 끊임없이 재생산되었지만 인간 이도의 모습의 나약함과 괴로움을 묘사한 부분은 관객들에게 공감을 유도하기 매우 좋은 묘사다. 우리가 국사(지금의 한국사)를 배울 때, 의정부 서사제를 부활시켰지만 일부 부서에서는 6조 직계제를 유지할 정도로 합리적인 제도를 만들었으며, 신하들과 토론을 잘 하기도 했으며, 한글도 만들고 정말 많은 일을 해낸 만능 대왕님으로 알고 있지만 지금까지 우리는 그의 내면과 고독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은 없었을 것이다. 세종대왕이 우리나라의 만원권에 얼굴이 딱 박힐 정도면 새로운 것을 많이 만들었다는 것은 기존의 보수적인 신하들과 많은 갈등을 빚었을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세종대왕이 늙고 병들고 고독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이때, 장영실이 등장하게 된다. 장영실은 천민 출신으로 다양한 발명품을 만든 인물이다.  그동안 장영실 또한 과학자의 이미지가 강해 많은 영상에서 이성적이고 까칠한 인물로 묘사가 되었다. 그런데, <천문 : 하늘에 묻는다>의 장영실은 똑똑한데 눈물이 많은 후덕한 아저씨로 등장한다. 이 영화는 왕권에 앉아 고독했던 세종과 천민 출신이지만 자신을 인정해주고 함께 꿈을 꾸며 친구로 인정받는 장영실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나는 이 부분이 정말 좋았는데, 세상의 제일 위에 서있는 고독한 왕과 세상의 끝에 고개 숙인 노비는 어쩌면 비슷한 처지에 놓여있는 사람들이 아닐까? 왕은 조선을 이끌며 왕위를 지키기 위해 누구도 믿지 못하며 노비는 조선에서 누구도 인간 취급을 하지 않는 고독한 존재다. 양극단은 서로 통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세종과 장영실이 서로 우정을 나누며 꿈을 꿀 수 있다는 것이 설명이 된다. 이 영화의 백미는 바로 고독한 두 사람이 서로를 알아보며 서로를 위해 눈물을 흘린다는 것이다.


훈민정음이 모든 것을 망쳤다.


    세종대왕과 장영실의 우정 그리고 신분을 뛰어넘어 서로를 인간 대 인간으로 대하는 모습은 이 영화의 장점이다. 그러나, <천문 : 하늘에 묻는다>의 큰 문제는 바로 서사가 부실이다. 몇몇 부분에서 고증의 문제가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영화에서는 조선왕조실로에 몇몇 부분에 영감을 받아 제작을 했다고 밝히며 픽션이 가미되었다는 것을 밝혔기 때문이다. 다만, 문제가 되는 부분은 <천문 : 하늘에 묻는다>의 제목과 훈민정음을 엮은 것이 너무 부자연스럽다는 점이다. 이성적인 관객의 입장에서 <천문 : 하늘에 묻는다>라는 제목을 보았을 때, 당연히 드는 생각은 장영실과 세종이 서로 새로운 과학기술을 발명하며 겪는 고통을 보여줄 것이라는 생각을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큰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장영실이 새로운 과학기술과 발명품을 만드는 부분을 너무 초고속으로 소비해버린다는 것이다. 정말 장영실의 과학 발명품을 구현하고 묘사한 부분은 영상미가 넘치지만 과정이 너무 빨리 지나간다. 도대체 장영실과 세종대왕이 새로운 과학 발명품을 만들면서 고뇌하는 부분을 전혀 묘사하지 않고 갑자기 훈민정음으로 나가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나는 이 부분이 아쉽다. 세종대왕의 괴롭고 노쇠한 모습을 겉으로 묘사하는데는 성공했지만 세종대왕은 다시 진부한 인물로 회귀된다. 세종대왕은 이제 훈민정음과 거리를 두었으면 한다. 한 나라의 언어체계를 만들었다는 것은 당연히 위대한 것이지만 사골국을 끓여 먹듯이 훈민정음에만 집중하는 세종의 모습은 매우 진부하다. 훈민정음 때문에 장영실은 캐릭터성이 확 죽어 버린다. 장영실을 빼놓고 정인지, 성삼문, 조말생 등을 장영실을 대체할 수 없다. 즉, 훈민정음 때문에 장영실이라는 캐릭터는 장영실이라는 캐릭터성이 죽어버리는 아이러니가 나타나게 된다. 훈민정음이 나타나면서 <천문 : 하늘에 묻는다>라는 제목 자체가 흔들려 버리는 문제가 발생한다. 앞에서 인간 세종과 인간 장영실의 우정을 강조하며 함께 꿈을 꾼다는 감독의 의도는 알겠지만 영화는 속도 조절에 실패하고 훈민정음이 아주 좋은 소재, 좋은 배우들의 연기, 좋은 제목 모두를 재미없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대한민국 역사 영화는 언제나 국뽕물이 넘쳐나야 하는가?


    <천문 : 하늘에 묻는다>에서 실소를 머금께 한 부분은 장영실이 중국 관리에게 자신의 오줌을 붙는 장면이었다. 명나라의 신하는 중국 천황의 대리인이다. 당시 조선의 상황으로 보았을 때 조선이 자주성을 보여주려고 했다고 인정을 하더라도 대놓고 명나라 사신에게 오줌을 붙는 행위는 말도 안 되는 부분이다. 세종대왕이 태종의 옷을 입고 명나라 사신을 협박하는 부분도 참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세종대왕 시기에 명나라는 깡패 국가였다. 현대로 생각해보면 문재인 대통령이 트럼프의 장관을 협박한다는 것인데 영화가 너무 나갔다. 그리고, 훈민정음을 반포하는 의도가 언제나 세종대왕이 백성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강조를 하지만 이것은 자국 역사에 대한 지나친 미화라고 생각한다. 당연히 위대한 세종대왕이 백성들을 사랑한 부분은 있을 테지만 훈민정음을 반포한 주된 이유는 백성들이 글을 읽혀 읽고 쓸 수 있게 되는 것이 방점이 아니다. 진정한 목적은 조선의 성리학적 사상을 백성들이 이해하기를 위해서다. 즉, 세종대왕은 백성들을 유교윤리를 따라 통치에 편리를 위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천문 : 하늘에 묻는다>의 세종대왕은 명나라에 굴복하지 않고 협박도 하며 동시에 백성만 생각하는 진부한 인물로 그려졌다. <천문 : 하늘에 묻는다>는 배우들의 열연과 좋은 시작을 했지만 영화의 클라이막스로 갈수록 국뽕과 진부한 세종 캐릭터를 답습했다. 아쉽다. 소재도 좋고, 캐릭터들고 개성 넘치고, 시각적 영상미도 멋진데 서사의 빈곤함이 대박을 터트릴 만한 영화를 평작으로 만들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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