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커> 리뷰
생쥐들이 들끓는 고담시
"쥐는 설치류이지만 육식도 하지. 자네도 알고 있겠군. 이 도시의 빈민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 들은 적이 있을 걸세. 어떤 지역에서는 오 분간도 아기를 집에 혼자 놔두지 못한다네. 쥐들이 덤벼들어서 말일세. 놈들이 순식간에 아기를 뜯어 먹고 뼈만 남겨놓는다는군. 쥐들은 병든 사람이나 죽어가는 사람한테도 덤벼들지. 놈들의 지능은 아주 뛰어나서 사람이 힘이 있는지 없는지를 기막히게 구별해 낸다네" (1984, 민음사, p.399)
영화가 시작할 때 생쥐들이 들끓기 시작한다는 뉴스로 시작이 된다. 생쥐라는 단어를 듣고 생각난 것은 바로 조지 오웰이 쓴 <1984>였다. <1984>의 주인공 윈스턴이 소설의 마지막에 고문을 당할 때 생쥐들을 보고 기겁을 하는 장면이 있다. 여기서 생쥐는 빅브라더의 통치에 예속된 사람들을 의미한다. <조커>의 생쥐들은 바로 고담의 엘리트층이 고담의 일반 시민들을 바라보는 모습이다. 브루스 웨인의 아버지 토머스 웨인이나 토크쇼 진행자 머레이 프랭클린이 쥐를 박멸하고 슈퍼캣을 통해 잡아버리자는 농담을 하는 것은 고담의 엘리트층이 고담의 일반 시민들을 얼마나 개돼지로 보는지를 보여준다. <조커>에서 토마스 웨인은 재력가이자 정치권력까지 잡으려는 야심가로 묘사되며 머레이 프랭클린은 언론을 비유적으로 보여준다. 고담이라는 사회는 소수 엘리트층에 의해 굴러가는 세상이다. 고담을 유지시키는 근본적인 힘은 바로 이성이다. 그런데, 고담의 이성과 사회질서는 대중의 상식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소수 엘리트층이 생각하는 선이며, 도덕이자, 공익이다. 즉, 소수의 엘리트가 옳다는 것이 고담의 법과 사회질서가 되는 것이다. <조커>는 1차적으로 미국 사회의 양극화 현상과 신자유주의의 모순을 보여준다. 그러나, <조커>에 대한 해석이 사회문제에 국한되는 것은 영화 <조커>를 반 밖에 해석하지 못하는 것이다. FBI에서 <조커>라는 영화가 위험하다는 것은 미국 사회에서 기존의 사회질서와 이성중심의 사회에 대해 반기를 들기 때문이다.
고담이라는 '거대한 정신병원' 에서 태어난 조커
<조커>에서 묘사되고 있는 고담은 매우 혼돈스럽고 정부의 태만함을 보여준다. 고담시에서 굳이 상징적인 건물을 하나 고르자면 그것은 바로 고담시에 위치한 정신병원이다. 정신병원에 대한 상징성은 미쉘 푸코의 <광기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중세 시대에는 정상인들과 정신이 이상한 사람들과 공동체를 이루며 잘 살아갔다. 즉, 중세시대에는 비이성적인 행동을 하더라도 광인들을 사회의 구성원으로 생각했지 그들은 치료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성이 득세한 고전주의 시기부터 대감호가 나타나게 된다. 대감호의 탄생 배경은 바로 이성을 판단기준으로 하여 이성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감호에 가둬버리기 시작했다. 대감호 제도가 시작된 초기의 광인이나 죄수들은 신체적 억압을 받았다. 노동을 해야하고 가끔은 구타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신체적 억압은 수감자들의 행동을 쉽게 변화시키지 못했다. 그리하여, 대감호의 간수들은 수감자들에게 도덕적 죄책감을 심어주게 된다. 지금 미치게 된 것이 바로 기독교의 원죄 때문이라고 말이다. 사실, 누구나 삶을 살면서 사소한 잘못이나 죄를 짓게 된다. 즉, 그 죄를 신앙으로 해결하고 이성적인 행동하는 것이 치료법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대감호의 시대가 지나가고 정신병원의 시대가 도래하게 된다. 정신 병원에 들어가는 광인들은 이성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치료해야할 대상으로 여겨진다. 정신병원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사회에 부적응자이고 비이성적인 사람이다. 고로, 이성적인 행동을 할 때 정신병원에서 퇴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 사회에서 정신병원의 존재는 모든 사람들의 행동을 통제하고 강요하다. 바로, 이성적인 행동을 해야만 하고 사회에 순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이다. 그리하여, 정신병원은 최고의 감시망을 만드는데 그것은 바로 '자기검열'이다. 바로 우리 자신이 내가 정신병자인지 아닌지 감시를 한다는 말이다.
고담의 빈민으로 살아가는 아서 플렉은 끊임 없이 슬퍼도 웃어야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린다. 그것은 어머니인 페니 플렉이 아서에게 끊임없이 행복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아서는 슬퍼도 끊임 없이 웃는다. 아서는 광기어린 웃음소리를 낼 때, 사람들이 처다보면 카드를 제시한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웃음은 병이니 이해해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아서의 웃음을 병으로 진단하고 판단한 것은 누구인가? 바로, 정신병원과 고담이라는 사회다. 고담은 이성 중심 사회를 의미한다. 만약 이성이 중심이 된 사회가 아니었다면 아서가 광인 카드를 들고 다닐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성이 중심이 된 사회에서 아서의 행동은 이방인의 행동이며 전혀 이성적인 행동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서는 사회에 의해 광인이라는 이름표를 들고 다니게 된 것이다. 사실, 아서의 웃음을 우리 모두 가지고 있다. 우리가 매일 살이 찌지 않고 말라야 한다는 것은 사회의 시선 때문이고 우리는 끊임없이 살을 빼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지며 사회가 요구하는 틀에 우리를 맞추려고 한다. 우리는 아름다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 언제나 자신을 검열하며 얼굴을 가꾸려고 하고, 특히, 한국 사회에서 돋보이려고 하기 보다는 중간 쯤 가려고 자신의 능력을 일부러 보여주지 않는다. 이처럼 아서 플랙이 웃으면서도 자기검열을 하는 모습은 현대인들이 끊임없이 사회에서 배제당하지 않기 위해 자신을 검열하는 것과 매우 닮아있다.
고담의 이방인 : 아서 플렉 그리고 조커
아서 플렉이라는 인물은 아주 독특한 인물이다. 알베르트 카뮈의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와 아서 플렉은 매우 닮아 있다. 아서 플렉은 뫼르소와 같이 사회성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사람이다. 코미디언이 되고 싶은데 웃기지도 않고, 센스도 부족하고 웃음이 나오는 포인트를 글로 적으려는 모습을 보면 그는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그러면서, 고담이라는 사회는 아서 플렉에게 '예의'가 없다. 아서 플렉이라는 약자를 구타하고 질책하며 그 누구도 아서 플렉을 사랑해주지 않는다. 사랑하는 어머니는 어린 시절 아서 플렉을 구타했고, 토머스 웨인은 자비로운 행세를 하지만 아서 플렉을 벌레 취급하며, 머레이 프랭클린은 대중 앞에서 아서 플렉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아서 플렉은 끊임 없이 조롱당하며 힘빠진 걸음으로 수많은 계단을 오른다. 광대 분장을 한 아서 플렉이 지하철에서 웨인그룹의 증권맨들에게 구타를 당하다 그 셋을 총으로 살해를 하게 되고 아서 플렉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이것은 마치 뫼르소가 태양 때문에 아랍인을 총으로 쏜 것과 같은 장면을 연상케한다. 웨인 그룹의 세 증권맨을 쏜 것은 아서 플렉이 의도를 가지고 쏜 것이 아니라 아서 플렉을 압박하고 밀어붙이는 고담이라는 사회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쥐로 상징되는 대중들은 조커에게 열광하기 시작한다. 영화의 막판부에 아서 플렉은 자신의 어머니가 자신을 입양하고 구타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어머니를 살해한다. 이는 영화에서 아주 의도적으로 아서 플렉이라는 인물이 사회에서 이방인이라는 것을 직접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고담의 이방인은 어머니를 살해하면서 그동안 자신을 억누르던 사회로부터 자유함을 느끼게 된다. 사회의 법, 가족관계, 종교, 결혼제도, 사랑 등 모든 것이 사회에서 만들어 놓은 것이며 이런 사회를 아서 플렉은 사회의 부조리로 보았다.
아서 플랙은 머레이 프랭클린을 살해하며 조커로 완전하게 각성하게 된다. 즉,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 항거를 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조커는 경찰에 연행된다. 그런데, 조커의 행동을 보고 그동안 분노를 참고 있던 생쥐들이 토머스 웨인과 부조리한 고담이라는 사회에 대해 항거를 시작하게 된다. 사회의 타락한 엘리트들에게 폭동을 일으킨 것이다. 그때 시위자들이 경찰차에 연행되는 조커를 구하려고 경찰차와 충동을 하고 조커는 정신을 잃는다. 그때 조커의 추종자들은 조커를 머레이 프랭클린을 살인한 범죄자로 보는 것이 아니라 성자의 모습으로 그를 바라본다. 고담의 빈민층이었고 이방인이었던 아서 플랙을 부셔진 경찰차 위에서 정신을 차리고 '조커! 일어나라'라고 외치는 성난 군중 속에서 춤을 춘다. 솔직히, 영화를 전율을 느낀 적은 별로 없는데 조커가 자동차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차 위에서 춤을 추는 모습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전율을 느끼게 해준다. 조커가 춤을 추는 모습은 그가 고담의 성자가 되고 마치 신이 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조커가 춤을 추는 동시간대에 한 쪽에서 토머스 웨인과 웨인 부인은 살인을 당하게 되고 어둠 속에서 배트맨이 태어나게 된다. 영화 <조커>에서 조커와 배트맨의 탄생이 동시에 다루어지게 된 것이다. 참 멋진 장면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아서 플렉은 정신병동에 갇히게 된다. 알베르트 카뮈가 생각한 사회 부조리에 대한 저항은 저항을 하면 그에 대한 책임까지 감당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아서 플랙의 저항이 도덕적으로 맞고 틀리느냐의 판단을 떠나서 아서 플랙은 사회 부조리와의 싸움에서 자신의 실존을 찾았다. 자유롭게 춤을 추는 모습은 자신이 사회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아서 플랙이 화장실에서 춤을 춘 이유
<조커>는 어떻게 보면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결혼제도, 가족제도, 사회제도, 종교 등이 나의 실존을 억압하는 상태를 아서 플랙은 사회의 부조리로 보았다. <조커>라는 영화를 보면 위험한 가치가 내재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조커>가 시사하는 바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삶에 대한 고민을 멈춰 버렸다. 사회 체제에 순응하고 사회에서 부여하는 역할이 마치 자신의 정체성인 것처럼 말이다. 아서 플렉이 자유롭게 춤을 추는 모습은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변신>에서 주인공 그레고르가 어느날 이유도 알 수 없이 벌레가 되고 사회활동을 못하게 되었을 때 처음으로 자신의 신체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모습과 비슷하다. 우리는 미쳐 날뛰어가는 사회 속에서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떻게 죽을 것인지, 무엇을 하고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 없이 살아가게 된다. 언제나 사회의 제약조건 하에서 자신을 바라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필연적으로 죽을 존재라는 것을 자각하고 그 앞에서 내 존재에 대해 처절하게 고민하게 될 때 조커는 춤을 췄다. 자신을 억압하는 사회로부터 자유로워졌기 때문이다. <조커>라는 영화는 실존주의 영화의 끝판왕이다. 이 영화는 알베르트 카뮈의 <이방인>을 현대판으로 재해석한 영화라고 생각하며 글을 끝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