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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성 Jun 07. 2019

<기생충>같은 서울, 그러나 서로 만날 수 없는 사람들

<기생충 리뷰>


<기생충>을 보면서 제일 먼저 느낀 것은 자본주의의 모순도 대한민국의 양극화도 아니었다. 영화를 보고 나왔을 때 부산 해운대 훈련소로 갔을 때가 생각났었다. 그 당시 우리 소대에는 서울에서 온 훈련병 반과 경남 쪽에서 온 훈련병 반이었다. 주말에 할 이야기가 없을 때 사회에서 무엇을 할지 이야기를 했었다. 그때 서울에서 온 친구들은 대학을 가겠다고 했지만 경남 친구들의 대답을 날 놀라게 했었다. "행님, 우리는 이거 끝나고 공장갈꺼에요'라는 대답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 나는 통계를 통해 대학에 진학하는 사람들이 70%를 넘는다고 보았고 70%면 대부분의 학생이 대학에 진학한다고 머릿 속에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모두가 대학에 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때 내가 살아가는 세계가 다가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그러면서 내가 대한민국에 산다고 하여도 모든 것을 알 수 있을까, 모든 것을 경험하지 않는다면 공감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생각을 했었다. <기생충>은 서울에 사는 두 집안의 세상은 달랐고 과연 두 계층이 화해를 하고 협력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같은 서울 그러나 다른 세상에 사는 두 가족


<기생충>의 김기택(송강호)집안과 박동익(이선균)의 집안이라는 두 세계로 나뉘게 된다. 기택의 집은 반지하방으로 집과 화장실이 하나의 공간으로 사용되며 취객이 노상방뇨를 하면 그 장면이 보이는 집에 거주한다. 그에 비해 박사장의 집은 성북동의 집이고 마당이 있으며 아름다운 인테리어를 보유한 집이다. 봉준호 감독은 의도적으로 집안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점을 계속 보여준다. 기택의 가족은 세상을 바라보면 더럽고 취객이 노상방뇨를 하는 거리에 살고 있다. 그에 비해 박사장의 집은 아름다운 정원을 보여준다. 이처럼 이는 부자 가족과 가난한 가족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게 인식하는지에 대해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기택의 가족이 보는 세상은 하루하루가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삶을 살아간다. 피자집 주인의 핀잔에도 고개를 조이라며 잘 보이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박사장 가족은 주위 사람들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보며 명령을 하며 살아간다. 봉준호 감독이 두 가족을 사는 장소를 선정한 것에 있어서 공을 들였다고 생각하는데 반지하 방에서 세상을 올려다 본다면 박사장 가족은 성북동이 고개 위에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지리적 위치와 시선이 위로 향하느냐 아래로 향하느냐에 따라 두 집안을 비교했다는데서 극찬할만하다. 두 집안이 사는 세상은 서울이라는 공간에 있다 하더라도 절대로 만날 수 없다. 오직 두 집안이 만날 수 있는 공간은 유일하게 박사장의 성북동 집이다. 그곳에서 박사장 집안은 주인의 형태로 기택의 가족은 피고용인의 형태로 밖에 만날 수 밖에 없다.



부자들이 살아가는 사회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에서 부자는 그동안의 영화들에서 스트레오 타입으로 나오는 재벌들의 행태와는 다른 행보를 보인다. 한국 영화에서 부자 계층으로 상징되는 재벌들은 똑똑하고 그 누구보다 치밀하며 가족 내에서도 끝없이 긴장감을 조성하며 약자들을 착취하는 악인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그러나 봉준호 감독은 부자들을 묘사할 때 현실적인 방법을 취하는데 돈이 많고 권력은 있지만 오히려 순진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동안 한국 영화에서 부자들과 재벌을 동일선상에 놓고 영화의 극적 효과를 위해 부자들은 모든 것을 아는 전지적 존재로 그렸다. 그러나 박사장과 박사장의 부인은 현실적인 대한민국의 부자를 보여주었다. 기택의 아들 기우(최우식)가 학력을 위조하고 영어과외 선생으로 박사장의 부인을 만날 때 작사장의 부인은 마당에서 고개를 박고 자고 있었다. 그동안 다른 영화들에서 사모님들은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소파에 앉아 긴장감을 조성하며 권력을 행사하는 존재라면 박사장의 그동안 모든 영화들에서 나온 사모님들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기우가 자신의 위조된 학력을 보여주지만 기우의 친구 소개로 왔기 때문에 믿는다고 하며 수업 참관을 한다. 수업 참관하며 재밌는 점은 기우가 영어를 가르치는 장면이 전혀 나오지 않고 학생의 멘탈잡는 방법을 보여주고 장면은 곧바로 기우의 채용으로 넘어가게 된다. 이 장면은 부자들의 세상을 아주 잘 보여주는데 부자들은 겉으로는 깐깐하게 구는 것 같지만 오히려 허술한 면이 있으며 그들이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은 지인의 소개가 많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의 세계는 좁고 그들의 인식 또한 좁게 형성될 수 밖에 없다. 부자들의 문제는 바로 이 지점에서 나타나게 된다. 아는 사람의 지인을 소개받기 때문에 대부분이 계층이 비슷하고 서로의 대화 주제 또한 비슷할 수 밖에 없다. 그리하여 부자들의 세상에서 기택과 기우같은 가난한 사람들이 처한 상황이 얼마나 힘들고 비극적인지 알 수 없다. 가난한 사람들의 삶과 처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고용하며 이들을 하인같이 부린다. 기택은 운전기사로 일하지만 동시에 마트에서 장을 보는 것을 도와주며 가사도우미로 일하는 기택의 부인은 박사장의 집에 상주하며 먹고 자고 끊임없이 일을 한다. 그러나 부자들은 아주 간단하고 쉽게 이들을 해고해 버린다. 부자들의 입장에서 고용과 피고용의 관점에서 해고를 하고 안 하고는 당연한 일상이지만 가난한 자들에게 해고라는 것은 곧 생존의 문제로 다가오게 된다. 이처럼 부자들이 피도 눈물도 없는 모습으로 묘사되는 것의 근본에는 가난한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인식이 전혀 존재하지 않고 인식이 없으니 공감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


그동안 한국 영화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돈은 없지만 선한 사람들의 집단으로 묘사되었다. 즉 부자는 악이고 가난한 사람들은 선이라는 이분법으로 대부분의 영화가 그림을 그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봉준호 감독은 부자를 비판하는 동시에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비판을 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영화의 제목처럼 기생충 같은 존재로 묘사된다. 이들은 돈과 권력은 없지만 부자들보다 세상물절에 밝으며 어떻게 보면 약아 보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기택 집안이 박사장 집에 사기를 치기 시작할 때 가족이 합심하여 계획을 고안하고 돈을 뜯어 낸다.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하인이나 가난한 사람들을 인격적으로 대우하지 않는 것처럼 가난한 사람들 또한 부자들을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기택 집안은 박사장 가족을 오로지 돈을 뜯어 내는 ATM으로 생각할 뿐이다. 그렇지만 기택의 가족은 박사장 가족을 바라보며 언제나 웃으며 자신의 본심을 숨겨 버린다. 아무리 부자들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들 앞에서는 바람 앞의 촛불이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에 비해 현실적이고 약았다고 하더라도 이들 또한 어수룩한 모습을 보인다. 기우가 박사장의 딸을 가르치며 그녀와 결혼할 꿈을 가족들에게 말하는데 가족들은 즐거워하며 기우의 꿈이 현실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라며 응원을 하며 해피앤딩을 꿈꾼다. 그러나 이 모습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가. 앞에서 부자들은 자신들이 아는 지인들을 통해 네트워크를 형성하는데 기우와 같은 이방인을 자신의 딸의 결혼 상대로 생각한다는 것은 가능성이 매우 적어 보인다. 이들이 이런 허황된 꿈을 꾸는 것은 부자들의 세상을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부자들의 세상과 가난한 사람들의 세상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으며 그들은 자신이 바라보는 세상으로 서로를 평가할 뿐이다. 그리하여 서로에 대한 공감이 부재할 수 밖에 없다. 기택은 전혀 박사장에게 투쟁을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계급의 차이가 그만큼 크다는 것을 기택 조차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투쟁은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게 된다. 기택은 자신의 부인을 박사장 집안의 가사도우미로 취직시키기 위해 기존에 있던 문광을 쫓아낸다. 기택은 기존의 기사를 쫓아내고 박사장의 운전기사가 되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박사장은 현실적으로 자신들이 투쟁하고 갈등을 한다고 해서 이길 수 없는 존재로 무의식적으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생존에 대한 투쟁은 가난한 사람들 내에서 서로를 물어 뜯어며 일어나며 가난한 사람들 내에서도 계급이 나타나게 된다.



가난의 냄새에 대하여...


냄새가 난다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지 않은 말이다. 이런 경우가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종종 혀를 잘못 놀려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며 평생의 상처로 남게 만든다. 이런 일이 발생하는 근본은 바로 상대방에 대한 공감능력의 부재에서 발생한다. 공감능력이란 타인의 입장에서 자신의 말을 어떻게 들을지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다. 봉준호 감독은 냄새 혹은 악취를 통해 가난한 사람들의 냄새를 묘사했지만 이는 부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의 라이프 스타일에서부터 차이를 보인다. 몇 가지만 지적을 해보면 박사장 집안은 대부분 의자에 앉아 있다. 그에 비해 기택의 집안은 바닥에 앉으며 한쪽 다리를 지지대처럼 세우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기택의 가족이 박사장 가족이 캠핑을 갔을 때 몰래 집을 점령했을 때 소파에 앉아서도 보이는 모습이다. 또한 돈을 나름 벌었을 텐데 기택의 가족은 기사식당에서 뷔페를 먹는다. 사실 영화를 보면서 페밀리 레스토랑을 갈 것이라 예상했지만 기사식당으로 가서 먹는 것을 보고 많은 생각을 했었다. 또한 기택의 집안이 술을 먹을 때 술을 잔에 따라 마시는 것이 아니라 병체로 마시는 것을 통해 이들의 라이프 스타일과 박사장의 라이프 스타일에는 차이를 보였다. 이처럼 냄새라는 것은 각 집안의 라이프 스타일을 보여주는 것이다. 행동 하나하나에서부터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구분은 가능하며 이는 그들이 각각 살아가는 세상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즉 냄새라는 것은 상징적이지만 현실적으로 보았을 때 라이프 스타일을 상징화한 것이다.



냄박사장에게 칼을 찔렀던 냄새나는 김기사


어느 날 비가 오게 되고 기택의 반지하는 홍수로 인해 물에 잠기게 된다. 그리하여 기택과 자식들은 체육관에서 잠을 자게 된다. 그 다음날이 주말인데 박사장은 비가 오고 세상이 맑다고 기뻐한다. 그리고 박사장은 자신의 아들 생일을 위해 자신의 친구들을 초대하고 기택의 가족을 초대하여 아이의 생일을 도우라고 명령한다. 기택은 그동안 박사장에게 인격적 모독을 당했는데 바로 반지하 냄새가 난다는 것이었다. 봉준호 감독이 이 냄새를 아주 강조하는데 관객들이 이해하기 쉽게 묘사하는데 가끔 비오는 날 지하철에서 풍겨오는 악취를 기택의 냄새로 묘사한다. 기택은 냄새가 난다는 것에 상처를 받는다. 인간에게 있어서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것은 최소한의 인간의 존엄을 짓밟는 일이다. 박사장은 그냥 지나가는 소리로 했지만 그 이야기는 기택 가족의 마음에 대못을 박은 행위였다. 파티가 진행될 때 그동안 문광의 남편은 박사장 집의 방공호 속에 숨어 있었는데 칼을 집어들고 박사장 가족을 해하는 것이 아니라 기우의 머리를 돌로 처버리고 기택의 딸 기정의 가슴에 칼을 꼽아 버린다. 이에 분노한 기택의 부인은 소세지가 꼳힌 바베큐 봉으로 문광의 남편을 찌른다. 문광의 남편은 죽을 때까지 박사장에게 '리스펙트(Respect)'라는 말을 남기고 죽는다. 그때 박사장은 문광의 남편의 냄새를 맡으며 찡그린 얼굴을 보이자 칼을 집어들고 박사장을 찔러 살인을 저지른다. 그리고 기택은 문광의 남편이 숨어 있던 방공호로 들어가 진짜 기생충이 되어 버린다. 기택이 태양 밑에서 힘들어하며 냄새에 자극을 받아 박사장을 살해하는 모습은 프랑스의 작가 알베르트 카뮈의 <이방인>의 태양 살인과 닮아있다. 공감능력 없는 뫼르소는 태양 빛이 강하다는 이유로 아랍인을 총으로 살해한다. 그리고 부당한 재판을 받으며 뫼르소는 군중들의 야유 속에서 마치 자신이 선지자가 된 것같은 모습을 보이며 사형장으로 끌려간다. 기택 또한 뫼르소의 모습으로 닮아있다. 뫼르소처럼 기택은 명확한 동기 없이 박사장을 살해한다. 두 살인 모두 동기가 명확하지 않지만 뫼르소는 태양 때문에 살인을 저질렀고 기택은 냄새 때문에 살인을 저질렀다. 이처럼 태양이나 냄새는 사회의 부조리함이 그들을 극단으로 밀어붙이고 뫼르소는 방아쇠를 당기고 기택은 칼을 꽂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그들은 사회의 부조리함에 저항을 했다. 그러나 뫼르소는 저항을 완성시키지만 기택은 저항을 완성시키지 못한다. 저항이라는 것은 사회에 대한 저항을 하면 그에 대한 응당한 대가를 받아야 완성이 되는 것이다. 뫼르소는 살인을 저지르고 사형을 받는 것으로 저항을 완성시켰으나 기택은 저항을 하고 기생충이 되어 사회의 응당한 대가를 받지 않고 도망친다. 봉준호 감독은 잔인하다. 뫼르소는 소설 속에서 사회에 부조리에 대해 저항하는 영웅이자 순교자같은 모습을 부여주었지만 기택은 사회의 부조리에 저항에 대해 어떤 숭고함도 보여주지 않고 처절하게 기생충으로 살아가는 비극성을 보여줄 뿐이다. 



한국이라는 부조리 사회에서의 존재하는 두 세계


사실 <기생충>을 양극화라는 경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진보적 영화로 보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이는 양극화가 심화되는 대한민국 내에서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해 현실적인 면을 보여주는 영화다. 두 계층이 살아가는 세상은 완전히 다르며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다. 서울은 1970-80년대 이후 근대화가 되며 발전했다. 그리고 현재 대한민국은 경제강국이 되었지만 압축적 근대화로 인해 많은 문제가 발생한 것도 사실이다. 사실 <기생충>은 서로 다른 두 세계를 살아가는 가족의 이야기를 보여주며 그 누구도 절대 선도 아니며 절대 악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두 계층 사이에서 갈등이 일어나는 이유는 공동체 속에서 서로에 대한 공감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공감한다는 것은 자신이 타인의 경험한 경험을 비슷하게 경험했을 때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기생충>에서는 두 세계가 완전히 분리되어 있으며 부자와 가난한 사람은 서로에 대해 피상적으로 서로를 알고 있을 뿐 공감은 할 수 없다고 한다. 기우는 마지막에 박사장 집에 살인자로 평생을 숨어지내게 된 기택을 구원하기 위해 돈을 많이 벌어 박사장의 집을 산다고 마음을 먹는다. 처음에 기우가 성북동 집을 사는 모습이 나와 정말로 시간이 흘러 기우가 성북동 집을 샀다고 생각했는데 봉준호 감독을 잔인하게 그 모습을 부셔버린다. 그 장면은 반지하 방에서 기우와 기택의 부인이 생각하는 이상적 꿈일 뿐이었다. 현실에 비추어 보면 성북동 집을 사는 것 자체가 정말 쉽지 않을텐데 아무런 현실도 모르며 기우가 그 집을 구매하겠다는 꿈은 대한민국 사회에 꿈도 희망도 없는 비극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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