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민성 May 22. 2019

<사바하>의 결말을 정리해보다

<사바하> 리뷰



<사바하>는 불교의 탈을 쓴 기독교의 신에게 던지는 질문


<사바하>는 한국 영화에서 2019년 잘 만든 영화다. 나홍진 감독의 <곡성>과 비교했을 때 <곡성>은 모호하고 영화 내에서 무엇이 사실인지 아는 것이 쉽지 않았다. 지금까지 예전에 쓴 곡성 리뷰가 사람들에게 검색되고 읽히는 것을 감안하면 <곡성>은 예술영화 같다. 그에 비해 <사바하>는 감독님이 친절하다. 어느 부분에서 어떤 성경 구절이 나오는지 불교 경전의 이야기가 나오는지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처음에는 불교와 사이비 종교를 주된 테마로 하는 줄 알았지만 영화를 보다보면 '절대적으로 선하고 인간을 구원할 만큼 사랑 많은 신이 왜 신실한 믿음의 성도의 괴로움에 침묵하는가'라는 질문이 영화의 핵심 주제다. 개인적으로 이것을 보고 겉으로는 불교의 탈을 쓰고 있지만 <사바하>는 기독교의 신 즉 '하나님에 대한 회의'가 이면에 깔려 있다. 불교에서는 인간이 신에 대한 회의를 할 필요가 없다. 불교에서는 한 인간이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개인의 수행을 해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독교는 신에 대한 회의를 하기 쉬우면 내 주위에도 하나님을 열심히 믿다 교회와 하나님에게 등을 진 친구들도 많다. 불교를 믿는 친구 중에서 석가모니에 대해 회의를 하는 비율보다 기독교의 신에게 회의를 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바로, 신은 선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인데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계명을 받았는데도 뱀(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먹게 되었다. 선악과를 먹고 아담과 하와는 신이 되고 싶었던 죄 때문에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된다. 그리하여 구약에서는 제사장들이 어린양의 피를 통헤 제사를 드렸지만 신약시대 이후 부터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나타나 아담이 지었던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짊어지고 다시 부활하여 죄와 죽음에서 승리했다. 은혜라는 것은 '까치의 은혜'같은 은혜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는 어떤 행위나 개인적 수양을 통해서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오로지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에 은혜를 배풀어 자신의 아들을 속량해 인간을 구원했다. 즉, 구원은 인간의 힘이 아니라 오로지 신의 사랑과 힘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을 죽이면서까지 인간을 사랑했는데 왜 가족을 잃는 커다란 슬픔에서 하나님은 침묵하냐는 의문과 회의를 가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생각일 것이다.


대한민국에 있는 김제석들에게


김제석이라는 인물은 초반에 모호하게 표현된다. 그가 선한지 악한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김제석이 100년을 넘게 살며 나이를 먹지 않는다는 장치는 김제석이 영화에서 사이비 교주가 되었지만 처음에 품었던 마음은 선하고 자신의 수양을 열심히 하는 인물이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사실 김제석을 처음에는 욕심이 없고 선한 인물이었다가 타락하는 모습은 우리 사회의 문제를 일으키는 대형교회 목사들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개인적으로 대형교회 목사님들이 악한 마음을 가지고 사역을 시작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많은 목사님들이 6.25 전쟁 이후 어려움 속에서 작은 공간부터 목회를 시작했으며 많은 신도들의 아픔을 어루만졌기 때문에 대형교회로 발전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대형 교회 목사님들이 타락하게 된 것은 교회 내에서 목사를 신적으로 추앙하는 한국의 문화 때문에 발생했다. 원래 성경에서 목사나 장로나 집사나 모두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전하는 은사를 받은 사람일 뿐이다. 즉, 목사라 하여도 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100% 선하다고 볼 수 없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일부 대형교회 목사들은 권력자가 되었고 스타가 되었다. 과연 사이비 종교와 타락한 대형 교회 목사의 차이가 무엇인지 질문을 하게 된다. 사이비나 이단 종교의 핵심은 성경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모든 것을 비유로 생각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설명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곡해하는 것이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타락한 교회를 지키는 것이 무조건적으로 옳은 것일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사님들이 부와 명예 그리고 거짓에 빠져하는 설교에서 신도들은 주님을 만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해본다. 이런 고민은 나에게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주인인 교회에서 목사가 주인인 교회를 볼 때 믿는 사람들은 진정한 하나님은 만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나는 아직도 답을 내리지 못했다.



'그것'의 정체는 무엇인가?


많은 리뷰에서 그것을 미륵으로 바라보는데 개인적으로 '그것'은 신의 아들 예수로 해석할 수 있다. 고대 근동의 유대인의 눈에 예수라는 존재는 일종의 미친 사람으로 치부했다. 예수는 나사렛에서 제일 고결하지 못한 마굿간에서 태어났다. 요한복음에서 나다나엘은 예수가 신의 아들이라고 들으며 '나사렛에 선한 것이 어떻게 나올 수 있느냐'라는 질문을 한다. 이처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나사렛은 선한 곳이 아니며 시골 같은 곳으로 여겨졌다. 도대체 신의 아들은 예루살렘에서 태어나지 않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별로 좋게 보지 않는 나사렛에서 태어나게 된 것인가. 신의 아들은 사회에서 배제당하고 슬퍼하는 이들을 사랑하기 위해 비천하게 이 세상에 내려오게 되었다. 신앙심이 투철했던 종교지도자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예수는 광인이었다. 이스라엘에서 세리(세금 징수원)는 로마의 앞잡이이며 우리나라로 치면 친일파 같은 족속이었다. 이들에게도 예수님은 사랑을 주시고 구원의 기회를 주셨다. 종교 지도자들은 금식을 중시하는데 이 당시 예수는 제자들, 친구들과 먹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당시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의 눈에 예수는 신의 아들이 아니라 괴짜 선지자 정도로 보았던 것 같다. 그런데, 예수라는 깡촌 출신이 민중들 사이에서는 신의 아들, 메시아로 불리며 추앙을 받자 종교 지도자들은 로마의 총독 빌라도를 설득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라고 하였다. 로마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가 메시아가 되어 제국을 뒤집어 엎을까하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예수를 따르는 이스라엘의 민중들도 예수가 정치적 메시아가 되어 로마를 부셔버리고 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해주길 원했다. 그러나, 예수는 그러하지 않았고 십자가에 매달리게 되었다. 이때, 로마의 군인, 그동안 예수를 따르던 민중들, 예수의 열 두 제자들 모두 예수를 조롱하고 학대하고 배신을 했었다. 그렇게 예수는 인간의 구원 앞에서 모두에게 버림을 받았고 하나님 또한 구원을 위해 아들을 버렸다. 그리고, 예수는 죽음을 맞이하고 아담이 지었던 죄를 자신의 목숨으로 속량하고 부활하여 인간의 구원의 길을 열었다.


'그것'은 예수님의 모습과 흡사한 면을 보인다. 만약에 지금 우리가 열심히 교회를 다니고 있는데 이상하고 잘 씻지도 않는 아저씨가 나타나 자신이 예수의 아들이고 외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이 진짜로 신의 아들이라고 하더라고 믿을까? 오히려 그 아저씨를 이단이라고 하며 그 누구도 그를 신의 아들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장면은 '그것'에서 투영된다. 영화 첫 장면에서 금화의 나레이션과 함께 검은 염소들이 소리를 내고 부모가 모두 죽는 장면을 삽입해 '그것'은 사악한 존재라는 것을 주입시킨다. 매일 밤 그녀의 짐승같은 울음소리를 통해 '그것'의 악함을 강조한다. 그러나 영화를 마지막까지 보면 광신도 나한의 앞에 '그것'은 세상을 구원할 미륵의 형상으로 나타났다. 여기서 불교는 포장지라고 했지만 일종의 감독이 주는 힌트다. 서양과 기독교적 관점으로 보면 뱀은 악이며 사탄이다. 그러나 불교의 눈에서 뱀은 윤회의 굴레이며 신성한 동물이다. 감독은 불교적 관점을 보여줌으로 그동안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을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으로 볼 수 없다고 말한다. 기독교에서 모든 세상을 이분법으로 본다는 것은 틀린 말이다. 기독교인들이 제일 빠지기 쉬운 오류가 바로 이분법의 오류다. 이분법으로 기독교를 해석할 경우 이단에 빠질 수 있는데 가령 인간의 육체는 죄를 짓고 신과 영적인 것은 선하다고 할 경우 예수를 믿을 수 없게 된다. 예수는 신의 아들인 동시에 인간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신의 아들이기도 했지만 인간의 아들이기에 밥도 먹고 잠도 주무셨다. 그러나 이분법에 빠진 이단들은 인간의 육체인 예수를 부정하고 오로지 영적인 예수만이 진정한 예수라는 잘못된 가르침을 주었다. 그런데, 한국 기독교에서도 이런 이분법은 난무한다. 기독교와 비기독교로 나누어 비기독교를 정복하고 부셔야 한다는 생각 말이다. 그러나 예수는 창녀도, 매국노도, 범죄자도 모두를 사랑했다. 그들을 정복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처럼 인간의 감각기관과 이분법은 내 앞에 신이 있는데고 '그것'을 알아차라지 못하게 한다. 



정나한과 믿음


정나한은 사이비 종교에 감회되어 소녀들을 죽이는 로마 군인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런데, 성경에서도 정나한과 같은 인물이 나온다. 바로, 사도 바울이다. 청년 시절 이스라엘의 높은 종교지도자가 되고 싶었다. 성경에 나와있지는 않지만 사울이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울의 부모도 로마제국에 봉사를 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이스라엘 사회에서 귀족이며 상류층이었다. 뛰어난 지식을 갖고 있었으며 종교적으로도 청렴했다. 그는 바리세인이었다. 성경에서 바리세인은 부정적 집단으로 나오는데 바리세인은 하나님의 율법으로 구분되어 거룩 그 자체를 의미하는 집단이었다. 사울은 율법에 어긋나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 제거했다. 사울의 눈에 예수는 이단아였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모두 죽여야 하는 대상이었다. 어느 날, 사울은 다메섹에 예수를 따르는 신자들이 있다는 정보를 얻고 말을 타고 다메섹으로 달려간다. 그러다 예수를 만나게 되고 며칠동안 눈이 멀게 된다. 예수는 사울에게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질문을 한다. 그 이후 사울은 회심하고 자신이 쫓고 있던 모든 것이 율법일 뿐 예수가 보여준 사랑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신약에서 대부분의 서신서를 집필한 만큼 기독교 역사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된다. 정나한은 사이비 종교에 빠져 99년생 소녀들을 끝없이 죽이고 다닌다. 그에게는 열정이 있었고 자신이 하는 일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그것'을 죽이기 위해 '그것'과 대면할 때 정나한은 묻는다. "누구야, 너!" 그러자 '그것'은 '나는 울고 있는 자니라'라고 대답한다. 이 장면은 출애굽기의 모세와 하나님의 대화와 오버랩이 된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을 소개하며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소개를 한다. '그것'으 그동안 울부짓었던 것은 소녀들의 죽음에 대해 모두 알고 있었고 홀로 눈물을 흘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진정한 신을 만난 정나한은 김제석을 죽이고 구원을 받게 된다.



박목사의 회의와 신에 대한 질문


박목사는 신의 존재에 대해 끊임없이 회의하는 존재다. 우리가 착각하기 쉬운 것은 믿음의 반댓말은 회의가 아니라 불신앙이다. 회의는 믿음과 불신앙 사이를 배회하는 상태다. 만약 믿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절대로 신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신의 존재를 믿고 있기 때문에 신에 대해 분노하고 신이 있는지 없는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박목사는 언제나 이성적으로 따지는 신앙을 보여주었고 정나한은 질문 없는 무조건적인 믿음을 보여주었다. 이 세상에 우리는 박목사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보기도 하고 정나한 같은 사람의 믿음을 보기도 한다. 정나한의 믿음에서 부족했던 것은 신에 대해 한 번이라도 회의하지 않고 고민하지 않았다는 것이면, 박목사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정나한 같은 열정적인 믿음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정나한은 잘못된 사이비를 믿었지만 마지막에는 신을 만났다. 그러나 박목사는 단 한번도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영화는 끝나게 된다. 영화에서는 박목사의 물음에 답을 한다. '신은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는데 왜 아무 일도 안 하고 조용히 있나요?'... 이에 대해, '그것'은 '나는 울고 있는 자'라고 대답한다. 박목사는 자신의 가족을 잃었다. 그런데, '그것'은 끊임없이 죄없는 소녀들이 죽어나갈 때 괴로워한다. 신은 인간을 위해 자신이 제일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서 치욕적으로 버렸다. 이때 예수님은 괴롭다고... 왜 자신을 버리냐고 물었을 때 하나님은 침묵하셨다. <사바하>에서 인간은 이렇게 괴로운데 신은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에 답은 '나도 너희를 위해 내 사랑하는 아들을 죽였다. 아들이 눈물 흘리고 괴로워하는데도 나는 침묵했다. 내 아들이 괴로워하는데도 너희를 내가 사랑하기 때문에 내 제일 ㅅ랑하는 아들 예수를 바쳤다. 너희의 아픔을 나는 모르지 않고 언제나 너희의 슬픔을 듣고 있다.'라고 말이다. 박목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모르겠다. 회의가 긴 만큼 그 믿음도 길었으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1996년 피카츄, 2019년 30대 아저씨를 찾아온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