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도날 <서미싯 몸> 서평
'면도칼의 날카로운 칼날을 넘어서기는 어렵나니, 그러므로 현자가 이르노니, 구원으로 가는 길 역시 어려우니라'
독일 출장을 다녀오면서 서미싯 몸의 <면도날>을 읽었다. 이전에 <달과 6펜스>를 읽었었는데, <면도날>은 제목이 나에게 와닿지 않아서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매우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적극 추전을 받아서 비행기에서 잠자는 시간 외에 책을 읽었다. 제목과는 다르게 내용은 몰입되었다. <면도날>이라는 제목은 매우 난해하다. <달과 6팬스> 또한 서미싯 몸이 왜 제목을 이렇게 지었는지 알려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달과 6펜스>에서 달은 주인공 스태릭랜드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자연, 예술의 절정을 포함한 공간이며, 6펜스는 겉으로는 멀정하지만 안으로는 타락해버린 사교계와 물질만능주의에 빠진 타락한 사회를 의미한다. 서미싯 몸은 <달과 6펜스>의 구도를 <면도날>에도 똑같이 가져온다. 그래서, <면도날>이라는 제목은 무엇인가?
이 시대의 수많은 엘리엇과 이사벨을 위하여
엘리엇 템플턴이 누군가의 친구가 될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그는 사람을 만날 때 사회적 신분 말고는 아무것도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면도날, 민음사, p.19)
파리의 상류사회는 외부인의 침입을 거의 허용하지 않는다. 정치가들은 부패한 세계 안에서 같은 정치인들끼리만 교류하고, 부르주아 계급은 규모가 크든 작든 자기들끼리만 사귄다. 또 작가들은 작가들끼리 모이고, 화가들은 화가들 끼리, 음악가들은 음악가들끼리 어울린다. (면도날, 민음사, p.237)
소설의 초반부에 장대하게 엘리엇 템플턴에 대한 설명이 지루하도록 이루어진다. 그래서, 엘리엇이 주인공인가 하는 착각을 할정도였다. 여하튼, 엘리엇은 미국인으로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지만 약삭빠름으로 프랑스 사교계의 중요한 인물로 부상한다. 소설에 등장인물로도 등장하는 서미싯 몸은 템플턴을 똑똑한데 속물이라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엘리엇의 인간적 면모를 바라보며 불쌍히 여기기도 한다. 엘리엇은 사회적 지위와 사교계의 전통에 따라 사회가 옳다고 규정지은 행동을 신봉하는 사람이다. 엘리엇은 사회에서 규정해 놓은 법칙과 형식만 남은 도덕규범에 따라 사는 사람이다. 엘리엇이 소설에서 사건에 주요하게 나타나지 않지만 잊을만 하면 나타나는 부분에서 엘리엇은 형식만 남은 도덕규범의 화신이다.
이사벨은 사리를 분별할 줄 아는 처녀였다. 그녀는, 만일 래리가 파리에서 2년을 보낸 뒤에도 시카고에 돌아와 취직하기를 거부한다면 그와 헤어지겠다는데 동의했다. (면도날, 민음사, p.103)
엘리엇의 조카 이사벨은 소설의 주인공 래리의 약혼녀이다. 래리는 1차 세계대전에서 조종사로 참전했다 절친한 친구의 죽음으로 방황하게 된다. 변화된 래리는 인생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현재 유렵과 미국이 처해있는 사회 규범이 옳은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이사벨과 의견충돌을 일으킨다. 이사벨은 래리를 사랑하지만 래리가 전쟁 이후 직업도 갖지 않고 도서관에서 책만 읽는 것을 보면서 자신의 삶을 걱정한다. 그녀는 래리와 논쟁을 벌이고 래리의 마음이 변하지 않자 그와 파혼하고 1년 후 증권회사 사장의 아들 그레이와 결혼한다. 이사벨은 미국의 물질만능주의를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녀는 자신의 부를 위해 사랑까지 버렸다. 그러나, 이사벨은 끊임없이 래리 주위를 맴돌며 성적 대상으로 욕망하며 소유하려고 한다. 이사벨은 가족에게 헌신적인 그레이가 있지만 끊임없이 래리를 욕망한다. 또한, 사교계의 품위와 사회적 전통에서 벗어나는 사람들을 인간으로 바라보지 않고 없어져야 할 대상으로 규정해 버린다. 가족의 죽음으로 매춘부가 된 친구 소피를 인간취급하지 않으며 그녀의 죽음에 냉담하게 반응하는 것은 이사벨의 냉혹함을 보여준다.
현대인들의 비극은 무엇일까? 인간이란 존재는 태어난 순간 부모와 관계를 맺는다. 인간이 성장하면서 '나'라는 존재는 '타인'과 관계맺음이 필요하다. 오늘날 현대인의 비극은 '나와 타인의 인격적 관계'를 '나와 그것의 관계'로 변질에 있다. 즉, 현대인들은 상대방을 목적으로 대하는 것이 아닌, 나의 성공, 명예, 부를 위해 타인을 수단으로 이용하는데 있다. 결국, 인간은 타자를 '그것' 혹은 사물로 만들었을 때부터 고독해질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인간은 고독하고 불안하기 때문에 자신 안의 빈자리를 무엇인가로 채우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엘리엇은 사교계의 명성, 이사벨은 물질로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의 결말을 절망적일 뿐이다. 엘리엇은 죽기 전까지 자신이 사교모임에 초대받지 못했다고 울분을 토하며 사망하고, 이사벨은 친구를 죽음으로 이끌었지만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고 래리를 끝내 소유하지 못하고 살아가게 된다. 우리는 책을 읽으며 엘리엇과 이사벨을 분리하여 비판한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자. 우리가 거울로 바라볼 때 우리의 모습에 엘리엇과 이사벨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가? 우리는 '어디 사세요', '어떤 대학 나오셨어요'를 물으며 자신과 타인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저울질하며 살아간다. 우리는 끊임없이 소비하면 나를 위로하는 소비를 위해서 여행을 가고, 명품을 사며, 파인다이닝을 먹는다. 내가 나열한 이런 것들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지금 이 시대 또한 <면도날>의 시대와 별반 다르지 않으며, 엘리엇과 이사벨을 우리가 도덕적 우위를 가지고 비판할 입장은 아니라는 것 뿐이다.
구원의 길을 찾아 방황하는 래리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지만 모든 곳에 존재하는 것, 만물에 내재되어 있지만 동시에 만물이 의존하는 대상, 사람도 아니고 사물도 아니며 원인도 아니죠. 속성도 없구요. 항구 불변도, 가변도 초월한, 전체이자 부분이고 유한하면서 무한한 존재요. 시간에 따라 완성되지도, 완벽해지지도 않는다는 점에서 영원하죠. 그것은 진리이자 자유입니다. (면도날, 민음사, p.445)
래리는 1차 세계대전에서 친구가 고깃덩어리가 되는 것을 보고 인생의 허무감을 느낀다. 래리는 삶과 죽음 사이에서 엘리엇이 집착하는 사교계와 이사벨의 물질만능주의에 대한 환멸을 느낀다. 래리가 살던 시기는 계몽주의 시기의 마지막 시기로 이성의 힘으로 세상을 일깨우고 무지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완벽한 세상이었다. 그러나, 이성은 효율성에 빠져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한다. 도구적 이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세계대전이다. 그로 인해, 래리는 수치심(Shame)을 느낀다. 수치심(Shame)은 '불명예 또는 부적절한 행위로 발생한 문제로 인한 결과로 인해 고통스럽게 벅차오르는 감정'을 의미한다. 래리는 수치심을 느끼며 많은 질문을 던진다. '왜 신이 있는데, 악은 존재하는가?', '신은 왜 악을 창조하였는데 구원을 해주는 것은 맞는 것인가?'... 래리는 도서관에서 책을 읽으며, 노동을 하며, 인도의 스승을 만나며 끊임없이 자신의 구원을 위해 나아간다. 래리는 기독교의 신이 구원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인간이 선하다면 악을 왜 만들었는지에 대해 이해를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래리는 결국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자신의 구원을 찾는다. 고대 그리스에서 실체(Substance)는 완전함을 전제로 하였다. 그러나, 실체는 다른 것과의 의존하는 관계가 없다면 존재할 수 없다는 비판에 직면한다. 그리하여, 스피노자는 세상 전체는 자연이며, 신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 사회에 '나', '연필', '꽃' 등은 자연(신)이 파생된 존재이며 모두가 신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를 우리는 범신론이라고 부른다. 범신론적 생각에서 악 또한 신이 변형된 것이다. 자연의 입장에서 선과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선과 악을 느끼는 것은 인간의 주관적 판단일 뿐이다. 그리하여, 스피노자의 구원은 정서의 예속으로부터 해방되고 이성에 따라 살아가는 자유로운 인간이다. 결국, 래리는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구원을 깨닫게 되고 사회가 말하는 틀에서 벗어나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자유롭게 살기를 선택한다.
면도칼과 구원 사이에서...
도대체 <면도날>의 제목은 무엇일까? 면도날(Razor's Edge)은 사전적으로 '위험한 상황에 놓여있고, 결과 또한 불확실한 때'를 의미한다. 서미싯 몸이 <달과 6펜스>에서 서로 반대되는 개념을 놓았다면 <면도날>은 아마 '면도날과 구원'이 아닐까? 결국, 6펜스와 면도날의 세상은 인공적인 세상을 의미한다. 엘리엇, 이사벨, 그레이가 추구하는 6펜스이자 면도날의 세상을 말이다. 면도날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를 의미한다. 우리는 욕망을 따라 살아가며 언제나 불완전하며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살아간다. 대다수는 우리가 면도날 같은 세상에 놓여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명예, 권력, 재산, 소비 등을 위해 끊임없이 살아간다. 당연히 인간이라면 명예, 권력, 재산, 소비 등을 추구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지만, 이것이 자신의 삶에 목표가 되어 내 주변의 사람들을 수단으로 이용하고 물질만능주의에 빠지며, 자신의 불안을 안정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앞에 나열한 것으로 일시적인 불안감을 잠재울 수 있지만 그 끝은 허망할 뿐이다. 서미싯 몸이 제시한 스피노자의 범신론이 구원이자 해답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의 책을 읽으면서 우리가 생각해야할 것은 나의 불안을 무엇으로 채우고 있고, 진정으로 나 자신은 자유로운지에 대한 질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