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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바다 Aug 28. 2020

우리, 반 평의 공간

침대

침대에서 두툼한 베개를 등에 받쳐 놓고 창백한 얼굴로 글을 썼던 프루스트. 그는 낮에 잤고 밤에는 침대에 앉아 글을 썼다. 프루스트에게 침대는 편한 자세를 제공하고 따뜻하게 몸을 덥혀주는 공간이자 사물이었지만, 그보다 근본적으로 그에게 침대는 지나간 시간을 떠올리고 도래할 상상을 가능하게 한 공간이자 사물이었다. 그가 만약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침대에서 천식과 싸우며 집필하지 않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책상처럼 완고한 테이블에 꼿꼿이 앉아 썼다면 어땠을까. 어쩌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완전히 다른 작품이 되었을지 모른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프루스트가 침대에서 눈을 뜨고 꾼 한 편의 긴 꿈이다. 


Marcel Proust, 1871-1922

엄마가 죽은 후 그녀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으로 얼룩진 프루스트. 그는 엄마 없이 살기 힘들어했다. 그에게는 더 이상 자신의 삶을 스스로 ‘번역’할 용기도 희망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프루스트는 엄마가 죽은 후 4년 만에 〈스완네 집 쪽으로〉1부 ‘콩브레’를 완성했다. 그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아마도 자신의 침대 덕분이 아니었을까. 심약한 몸과 마음을 가진 그였지만 침대는 마지막 용기와 위로를 주는 공간이었다. 엄마의 죽음 후 그는 두문불출한 채, 침대에서 자기 자신(의 기억)과 슬픔을 창조적으로 번역했다. 만약 프루스트의 칩거와 그 칩거의 물리적 조건인 침대가 없었다면, ‘20세기 최대의 문학적 사건’이라고 불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Eugene Delacroix, Unmade bed, 1826

들라크루아의 <흐트러진 침대>. 그저 ‘흐트러진 침대’를 그렸을 뿐인데도 그의 다른 작품들만큼이나 격동적이고 열정적이다. 침대에 아무도 없고 어떤 사건도 보이지 않지만, 이미 많은 것을 보여준다. 단정히 정리된, 그래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무엇도 짐작할 수 없는 침대가 아닌, ‘흐트러진 침대’를 통해 많은 사람과 다양한 사건과 풍부한 감정을 상상하게 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주는 탁월한 방식을 화가는 알았다. 


누군가에게 저 침대는 격정적인 사랑을 나눈 곳이다. 누군가의 침대는 밤새 몸부림치며 절망의 고통을 견뎌낸 곳이다. 누군가에게 새로운 도약을 꿈꾸는 곳이다. 사랑하고 절망하고 모험하는 이 반 평의 공간, 침대는 가장 작은 세상이지만 가장 큰 세상이다. 



*안바다 신작 에세이, <나와 당신의 작은 공항>  9월 출간 전 일부 내용을 사전 연재합니다.


*다음은 출판사에서 제공하는 출간 알람 서비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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