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지런함과 분주함, 그 사이에서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를 만큼 바쁜 날이 있다. 정확히는, 그런 날이 이어질 때가 있다. 아침 일찍 눈을 떴고, 하루 종일 메신저를 확인하고, 중간중간 미팅도 하고, 틈틈이 메일 답장도 하며 열심히 일했었는데, 저녁이 되면 자꾸 허무하다. 무언가를 하긴 한 것 같은데, 그게 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성실하게 살고 있었는데, 정작 하나도 마무리되지 않았다. 이럴 때 사람들은 말한다. ‘내가 게을러서 그런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일지도 모른다. 너무 부지런했기 때문에, 그래서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경복궁 프라이빗 투어를 진행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은 “이걸 왜 이제 알았을까요?”라는 감탄이다. 사람들은 경복궁이 역사책에 나오는 그곳, 조선의 왕이 살았던 장소 정도로 생각하고 온다. 사진 찍기 좋은 배경, 가족 나들이 코스, 역사 좋아하는 사람이 선택하는 취향 관광지 정도로 여기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투어가 시작되고 근정전 앞에 도착하면 분위기가 바뀐다. 말 그대로, 사람들이 ‘멈춘다.’ 그냥 건물로 보던 근정전을 '읽기' 시작하는 순간, 사람들은 자신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근정전. 부지런할 근(勤), 정치할 정(政). 왕이 정사를 부지런히 돌보는 곳이라는 뜻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 이름만 보고도 고개를 끄덕인다. '아, 조선의 왕들은 열심히 일했구나.' 하지만 실록 속 설명을 꺼내면 표정이 바뀐다.
선조들이 말하기를, ‘아침에는 정사를 듣고,
낮에는 어진 이를 찾아보고,
저녁에는 법령을 닦고,
밤에는 몸을 편안하게 한다.’는 것이
임금의 부지런한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 태조실록 4년 10월 7일, 정도전이 말하다 -
경복궁을 설계한 정도전이 남긴 이 구절은, 그저 열심히만 하면 된다고 믿던 사람들의 믿음을 흔든다. 바쁘게 사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자신의 움직임을 되짚게 된다. ‘나도 요즘 너무 세밀한 데에만 흘러가고 있었던 건 아닐까?’ ‘내가 해야 할 바를 정확히 알고 움직이고 있었을까?’
며칠 전, 한 기업 교육 담당자분이 투어에 참여했다. 그는 매일 아침 출근 전부터 하루 일정 조율로 바쁘고, 퇴근 후에도 교육생 상담과 피드백 정리에 시간을 쓴다고 했다. 남들이 보기엔 모범적인 리더고, 시간 관리를 잘하는 사람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스스로 말하길, “하루가 너무 분주한데, 이상하게 할 일은 더 늘어나고 있어요. 오히려 내가 뭘 했는지 모르겠어요.”라고 했다. 그 말이 너무 익숙하게 들렸던 이유는, 나 역시 그런 시간을 오래 보냈었기 때문이다.
그는 게으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일’을 계속 움직이고 있었고, ‘시간’ 속에 계속 들어가 있었다. 문제는 방향이었다. 사람도, 일정도, 보고서도 모두 관리하고 있었지만, 본인이 직접 구상했던 핵심 프로젝트는 세 번째 월요일째 손을 못 댔다고 했다. 우리는 잠깐 걸음을 멈추고 근정전 뜨락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렇다면… 전 부지런했던 게 아니라 그냥 바빴던 거네요.” 부지런함과 분주함의 차이를 실감한 순간이었다.
조선의 왕들은 왜 새벽에 일어났을까? 정말로 일이 많아서였을까? 아니면 체질이 아침형 인간이라서였을까? 그들은 새벽 5시에 일어나 정사를 시작하고, 해가 지기 전까지 매일 수많은 결재를 내리고 회의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많이 했다’는 이유만으로 근정전이라 이름 붙이지 않았다.
여기서의 ‘부지런함’은 명확한 의도와 방향을 가진 움직임이다. 사람을 구하고, 시스템을 세우고, 자신이 움직일 이유를 알고 있는 상태. 그래서 조선의 왕들은, 부지런함을 사람에게 쏟았다.
내가 프라이빗 투어를 운영하며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도 그것이다. '정보를 주는 것'이 아니라 '방향을 보여주는 것.' 참가자들은 경복궁의 구조를 따라가며, 조선의 리더들이 어떤 사고방식으로 나라를 이끌었는지를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 구조와 원칙이 오늘 자신의 삶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지를 고민하게 된다.
사람들은 잘 정돈된 궁궐 안에서 ‘내 삶이 얼마나 어지럽게 돌아가고 있었는지’를 깨닫는다. 건물은 고요한데, 자신의 마음만 복잡했던 것이다. 그 순간이야말로 투어의 진짜 목적지에 도달한 순간이다.
부지런함은, 방향이고 우선순위이며 맥락이다. 분주함은, 방향을 잃은 상태에서의 가속이다.
사람들은 자꾸 일정 관리 앱을 바꾸고, 다이어리를 새로 사고,
루틴을 만들려 하지만, 그 이전에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질문이 있다.
“나는 지금, 어디에 부지런한가?”
이 질문이 없다면, 사람은 결국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눈앞에 있는 일'만 하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익숙하다. ‘바빴는데, 끝난 일은 없다.’
경복궁 근정전은 지금도 거기에 있다.
부지런할 바를 잃은 모든 사람들에게 조용히 말을 건네고 있다.
“그대는 지금, 무엇에 힘을 쓰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