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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소문에서 배우는 설득의 기술

상소문 파헤치기 : 조선의 한 관료는 어떻게 세종의 마음을 바꿨나


세종실록을 읽다 보면, 당대 신하들의 상소문 중 유독 눈에 오래 머무는 글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사헌부 집의 김 타가 올린 상소문은 단순한 행정 제도에 대한 의견이 아니라, “설득이란 무엇인가”를 가장 정교하게 보여주는 사례였다. 그는 수령의 임기를 60개월로 늘리는 것이 백성을 위한 길이 아니라고 판단했고, 이를 임금에게 직언했다. 그러나 그 방식은 결코 거칠거나 감정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어떤 구조를 갖춰야 하는지를 섬세하게 보여주는 모범이었다. 지금 시대에도 통하는 설득의 기술을 김 타의 상소문을 통해 살펴보자.



수령의 임기를 60개월에서 30개월로 줄여주십시오
(김 타의 상소문 핵심 문장)



원문 살펴보기 :


https://sillok.history.go.kr/id/kda_10706027_009


사헌부 집의 김타(金沱)가 수령의 임기를 60개월로 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으로 상소하기를,
“신은 들으니,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라고 합니다. 그 백성을 가까이하는 직임으로는 수령보다 중한 것이 없으니, 풍교(風敎:교육이나 정치의 힘으로 풍습을 잘 교화하는 일)를 받들어 이어 가고 은택을 베풀어 백성을 교화하며 백성을 돌보고 만물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수령의 직분입니다.


ㅣ1단계 : 문제를 어디에 놓을 것인가


그는 임기 조정 문제를 '행정 효율'이나 '인사 제도'의 문제로 규정하지 않았다. 대신 이 논의의 중심축을 '백성의 삶'으로 끌고 왔다. '이 논쟁을 무엇의 문제로 볼 것인가'를 먼저 정하는 것. '제도가 변하면 행정 절차만 달라지는 게 아니다. 백성의 일상이 직접 흔들린다.' 김타는 세종에게 이 점을 환기시켰다. 논의의 틀을 정하는 사람이 설득을 주도한다. 김타는 이 싸움을 '제도 개편 논쟁'이 아니라 '백성을 위한 선택'의 문제로 만들었다. 세종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무엇인지 그는 알고 있었다.


삼가 생각건대, 태조께서 왕업을 창건하여 후대에 물려줄 때 수령에 대한 고과 연한을 3년으로 정하고 감사가 포폄(褒貶:옳고 그름이나 선하고 악함을 판단하여 결정(決定)함.)하여 출척(黜陟:못된 사람을 내쫓고 착한 사람을 올리어 씀)하는 법을 세워 그것을 《경제육전(經濟六典)》에 실어서 후세에 영구히 전해지도록 하셨습니다.

태종께서는 그것을 잘 계승하여 그 터전을 배양하고 백성을 사랑으로 기를 방책으로
수령의 고과 연한을 예전의 제도대로 따르되, 다만 세 번 중고(中考:관리의 성적 고과에서, 상·중·하의 세 등급으로 나눈 가운데의 둘째 등급)를 받은 자는 파출(罷黜: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 직무, 직업을 그만두게 함)하고 연달아 중고를 받은 자는 태거(汰去:파면)하게 하셨습니다.

그 덜거나 보탠 내용을 《속육전(續六典)》에 갖추어 기재하여 훌륭한 계책을 남겨 후대에 밝게 보여 주셨으니, 그 길이 평안하게 다스려 나갈 방도를 제시한 것이 지극하고도 극진하였습니다.


ㅣ2단계: 뿌리를 먼저 확인한다


그다음 김타는 태조와 태종의 선례를 꺼낸다. "태조께서 왕업을 창건하여 후대에 물려줄 때 수령에 대한 고과 연한을 3년으로 정하고, 그것을 경제육전에 실어 후세에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태종께서는 그것을 잘 계승하여 터전을 배양했습니다."


여기서 김타는 영리한 선택을 한다. 그는 자신이 '새로운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조종의 법을 지키려는 보수적 선택'을 하고 있다는 말을 한다. 사람의 마음은 급격한 변화를 경계하기 때문이다. 특히 세종은 조상의 법을 중시하는 임금이었다. 김타는 이 심리를 정확히 짚었다. 그의 반대 의견이 조종의 정신에 부합하는 길이라는 것을 먼저 증명한 것이다. 법은 시대가 변해도 쉽게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는 세종의 철학. 김타는 자신의 의견이 바로 그 철학에 근거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중략)지난번에 조정의 신하들이 헌의(獻議:의견을 올리다)하여 수령에 대한 3년의 고과 연한을 고쳐 60개월로 정하고, 상고(上考)인지 중고인지에 따라 승진시키거나 파출하는 제도를 변경하여 재능이 중등으로 평가받은 사람도 체차하지 말도록 하였습니다. 그 의도는 ‘수령이란 백성에 대한 임금의 근심을 나누어져서 임금의 명으로 백성의 부모가 된 사람이다. 이 백성의 부모가 된 자는 그 직임에 오래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직임에 오래 있으면 일에 숙련되어 잘 다스리게 되므로, 백성이 그 혜택을 받을 것이다.’라고 여긴 것이 분명합니다. 헌의한 뜻이 간곡하였던 덕에 주상께서 윤허하신 것입니다.


ㅣ3단계: 상대의 선의를 먼저 인정한다


김타는 놀라운 한 수를 둔다. 반대 입장의 의도를 정면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 의도는 '백성의 부모가 된 자는 그 직임에 오래 있어야 한다. 오래 있으면 일에 숙련되어 잘 다스릴 것이니 백성이 혜택을 받을 것이다.'라고 여긴 것이 분명합니다." 5년 임기제(60개월)를 찬성하는 사람들의 논리를 김타는 깎아내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선한 의도를 먼저 언급했다. "당신들이 틀렸다"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말한다. "그 뜻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상대를 적으로 만들지 않는 것. 이것이 설득의 핵심이다.

신이 삼가 생각건대,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는 인재를 잘 알아보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데에 있으며,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요체는 법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예전 그대로의 인재를 데리고 오늘날의 새 법을 행하려는 것이니, 그 옛 제도를 변경한다 하더라도 백성들이 어찌 신뢰하겠습니까.

대체로 창업한 군주는 반드시 높은 견해와 월등한 지혜를 가지고서 오래도록 이어 갈 도리를 보여 주는 법입니다. 성스럽고 거룩한 조종들이 고금의 제도를 참작하여 적정한 제도를 세워서 억만년토록 끝없이 이어질 계획과 천백 세대에 이르도록 변하지 않는 기초가 될 것을 명명백백하게 법전에 실어 두셨는데, 겨우 한 대를 이은 때에 갑자기 그 법을 고치시니, 오늘날 고친 것이 훗날 또 총명한 체하며 교묘한 재주를 부려 다시 변경하는 일이 어찌 없겠습니까.


ㅣ4단계: 근본 원리를 제시한다


이제 김타는 자신의 철학적 기반을 제시한다.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는 인재를 잘 알아보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데에 있으며,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요체는 법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법이 아니라 사람. 이것이 김타의 핵심 논리다. 아무리 좋은 제도를 만들어도, 그것을 운용하는 사람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것. 그는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예전 그대로의 인재를 데리고 오늘날의 새 법을 행하려는 것이니, 그 옛 제도를 변경한다 하더라도 백성들이 어찌 신뢰하겠습니까." 제도만 바꾸고 사람은 그대로라면, 백성은 신뢰하지 않는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유효한 통찰이다. 조직 개편을 해도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신의 망녕된 생각으로는 수령을 자주 교체하는 것도 잘못이지만 오래 맡기는 것도 잘못이라고 봅니다. 자주 교체하면 사람의 마음이 등한해져 일 처리가 완벽하지 못할 것이며 오래 맡기면 사람의 마음이 나태해져 일 처리가 점차 형편없어질 것이니, 자주 교체하는 것과 오래 맡기는 것이 그 폐단은 같습니다.


ㅣ5단계 : 양 극단 모두 문제임을 보여준다


여기서 김타는 자신이 편파적이지 않음을 증명한다. 양쪽 극단 모두 문제라는 것을 먼저 인정한다. 이것은 설득에서 매우 중요한 기법이다. "나는 어느 한쪽 편이 아니라, 중도를 찾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 김타는 자신이 단순히


5년 임기제를 반대하는 사람이 아니라, 가장 합리적인 지점을 찾으려는 사람임을 보여준다.


이미 겪어 본 일로 말씀드리자면, 오래 맡기는 데 따른 폐단은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1.선비의 의지가 꺾입니다.

대체로 선비로서 벼슬살이하는 사람은 성실하고 조심성 있게 자신을 수양하면서 날짜를 꼽아 가며 진급되기를 생각하는 법인데, 한번 그 직임에 나가면 임기를 채워야 합니다. 어느덧 고과 연한이 지나가고 해가 여러 번 바뀌다 보면 굳건하던 의지는 꺾이고 떠돌이 신세로 살아가니, 자기 신세를 돌아보면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다가 혹 간사한 아전의 무고라도 당하면 엄격한 법조문에 의거하여 규탄받고 한 번의 실수로 이전 공로조차 깡그리 무너져 버리니, 선비들이 탄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2. 착취가 구조적으로 발생합니다.

다스려야 하는 백성들은 미련하고 어리석어 항상 해가 되는 것은 피하고 이로운 것만을 추구하거늘, 저 수령들은 가만히 앉아서 백성의 고혈(膏血)을 빨아먹으며 60개월이라는 기간 동안 한갓 전곡(錢穀) 등의 출납 문서나 잘 작성해서 기한 안에 보고하는 것만을 상책으로 여기고 백성을 편안하게 보호하고 은혜로 돌보아 주는 것은 힘쓰지 않으며, 한갓 긁어모으고 세금을 독촉하여 거둬들이기만을 능사로 삼고 백성을 어루만지고 편안하게 해 주는 것을 직분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심지어 공적 재화를 빼돌려 제 배를 채우고 백성들에게서 긁어모아 윗사람을 받듭니다. 그들이 뇌물을 쓰고 영달을 구하는 것이 모두 다 백성의 고혈에서 나오는 것이니, 백성들은 그로 인해 고통만 당할 뿐 이롭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실망만 하게 됩니다.
3. 나태 - 사치 - 방탕으로 필연적으로 변질됩니다.

처음에는 부지런히 하다가도 끝에 가서는 게을러지는 것이 인지상정이고 새것을 즐기고 낡은 것을 싫어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다 똑같습니다. 지금의 수령들을 보면 어진 수령은 항상 적고 탐관오리는 항상 많습니다. 그들이 부임하는 초기에는 각오가 대단하여 낮이나 밤이나 게을리하지 않고 나랏일에 최선을 다할 것이며 아침저녁으로 힘쓰고 수고하여 민생을 항상 염두에 둘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오래되어 임시방편으로 그럭저럭 해치우려는 생각이 한번 생기게 되면, 상주고 벌주는 것을 자기가 사랑하느냐 미워하느냐에 따라 결정하고 권한을 주고 빼앗는 것이 자신에게 은혜로운 이인지 원수로 여기는 이인지에 따라 좌우됩니다.

그러다가 말을 치달리고 잔치판을 벌이며 교만하고 사치하고 방탕하여 못하는 짓이 없게 됩니다.근자에 불행하게도 이런 일로 법에 저촉된 자가 한둘이 아닙니다. 또한 법망을 빠져나가 구차스럽게 세월을 보내며 욕심대로 함부로 굴어 마침내는 나라의 근본을 흔드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어찌 장담하겠습니까. 30개월의 임기에 대해서도 백성들은 오히려 싫증을 내는데 하물며 60개월이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백성들은 수령이 오래 재임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ㅣ 6단계 : 구체적인 폐단을 제시한다.


이제 김타는 본격적으로 오래 재임했을 때의 문제를 논리적으로 펼쳐낸다. 그는 "이미 겪어본 일"이라고 말하며 세 가지 폐단을 제시한다. 첫번째, 선비의 의지가 꺾인다. 이 폐단에서는 사람을 도덕적으로 비난하지 않았다. 대신 인간의 심리가 본래 그렇게 움직인다는 현실을 기반으로 논리를 전개했다.


두번째, 구조적인 착취 부분. 김타는 추상적인 비판을 하지 않았다. 그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구체적 현실을 묘사했다. 수령들은 백성을 돌보는 대신 서류 작업에만 몰두한다. 그리고 백성에게서 긁어모은 것으로 윗사람에게 뇌물을 쓴다. 설득은 원리만으로는 부족하다. 반드시 현장에서 보이는 실제 모습이 있어야 한다.


세번째, 나태-사치-방탕으로 이어진다는 부분. 이 구절은 오늘날 조직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현실과 전혀 다르지 않다. 초기에는 열정적이던 사람이 어느 순간 권한만 행사하는 모습. 김타가 지적한 것은 '한 개인의 타락'이 아니라 '오래된 권력이 필연적으로 낳는 구조적 타락'이었다.그리고 그는 결정타를 날린다.


"백성들은 수령이 오래 재임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신이 이 몇 가지 폐단에 대해 이리저리 생각해 보건대, 조종께서 규정해 놓은 법이 실로 중도에 맞으며 진실로 억만년토록 폐단이 생기지 않을 좋은 법입니다.


ㅣ 7단계 : 조종의 법이 중도임을 재확인한다.


김타는 이 모든 논리를 펼친 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이것은 단순한 전통 예찬이 아니다. "검증된 제도를 바꿀 때는 신중해야 한다. 검증되지 않은 논리는 위험하다." 이것이 그가 전한 메시지였다. '전통이니까 지켜야 한다'가 아니라, 오랜 시간 검증된 시스템은 섣부른 수정보다 안정성을 우선해야 한다는 제도 운영의 원리를 말한 것이다.


의논하는 자가 말하기를 ‘3년에 한 번씩 성적을 고과하고 세 번 고과한 다음 능력이 없는 자를 내치고 현명한 자를 승진시키기도 하였는데, 오래 재임하게 하는 법을 예전에는 행할 수 있었는데 어찌 이제는 행할 수 없겠는가.’라고 하기도 합니다마는,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말입니다. 시대에 따른 성쇠(盛衰)가 있고 세도의 소장(消長)이 있으며 풍속도 순후하거나 야박함의 차이가 있고 번다하거나 간략한 것도 형편에 따라 다른데, 어찌 옛일을 거론하여 오늘날에 시행할 수 있겠습니까. 전에 임기를 30개월로 하는 제도가 있었는데 해가 되는 점을 보지 못하였고 지금 60개월로 하는 법이 있는데 그 이로운 점을 볼 수 없으니, 어찌 조종의 법을 가볍게 변경한단 말입니까.

또 근래의 포폄에 따라 출척하는 법 또한 인정에 끌려 처리하는 일이 많습니다. 전최 계본(殿最啟本:업무 평가)이 올라온 날에는 한 도에 상등(上等)이 혹 40명씩이나 되어 팔도의 상등이 총 100명 넘게 나옵니다. 승진시켜 천전하는 날에는 허명뿐인 사람과 실제로 능력을 갖춘 이가 길을 같이하게 됩니다. 벼슬자리는 한정이 있는 까닭에 그 문제가 전조(銓曹)를 힘들게 만들고 성상께서 고심하시게 만듭니다. 더구나 중등의 인물들까지 함께 계산하자면 임기가 차서 천전해야 할 자가 거의 수백 명에 달할 것이니,빈자리를 살펴 적임자를 보임하는 일을 장차 어떻게 시행하겠습니까.


ㅣ8단계 : 예상되는 반론을 미리 제시하고 반박한다.


그리고 김타는 놀라운 기술을 보여준다. 상대방이 할 반론을 먼저 꺼내는 것이다. "옛날에도 했는데 왜 지금은 안 되나?" 찬성파가 할 법한 반론을 김타가 먼저 말한다. 그리고 조목조목 반박한다. 시대가 다르다. 사람이 다르다. 옛날 방식을 지금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 이것은 매우 현대적인 사고방식이다. 그리고 그는 마무리한다. 30개월로 하는 건 문제가 없었다. 60개월이 이로움이 보이지 않는다. 명확한 비교다.


신은 전하께서 지극한 도(道)를 넓히고 신명한 판단을 돌려 수령을 선발하여 임명하는 일을 전적으로 조종들이 한 대로 본받아 능력이 없는 자를 내치고 현명한 자를 승진시키는 방도와 고과(考課)를 통해 권장하고 징계하는 법을 한결같이 《경제육전》과 《속육전》의 제도대로 따라서, 30개월의 고과 연한을 거듭 밝혀 세 번 중고를 받은 자는 파출하고 연달아 두 번 중고를 받은 자는 태거하게 하소서. 그리고 전최 계본을 올릴 때에는 한 도에 상등이 많아도 10인이 넘지 말게 하며 3, 4인 정도에 그치게 하소서.

그를 통해 정밀하게 선발하여 전적으로 맡긴다면 명분과 실제가 부합하여 나라의 근본이 더욱 굳건해질 것이며 조종이 제정한 법이 실추되지 않고 인(仁)과 효(孝)로 다스리시는 성상의 덕이 더욱 백성의 바람과 부합할 것입니다.신이 지극히 어리석고 둔하지만 저의 무지몽매함을 헤아리지 않고 보잘것없으나마 충성을 다하고자 하는 정성으로 어리석음을 무릅쓰고 하는 수 없이 진달하는 것입니다. 부디 성상께서는 이를 잘 살펴서 시행하소서.”


ㅣ9단계 : 결정권을 상대방에게 돌려준다.


상소의 말미에서 김타는 이렇게 아뢴다."신이 지극히 어리석고 둔하지만 저의 무지몽매함을 헤아리지 않고 보잘것없으나마 충성을 다하고자 하는 정성으로 어리석음을 무릅쓰고 하는 수 없이 진달하는 것입니다. 부디 성상께서는 이를 잘 살펴서 시행하소서." 그는 자신의 직언을 '반항'이 아니라 '성심(誠心)'으로 마무리했다. 상대의 체면을 잃지 않게 하는 방식. 이것 역시 설득의 기술이다.




(읽느라 수고하셨습니다.. :)


김 타의 설득의 기술은 가히 놀랍다. 9단계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 문제를 어디에 놓을 것인가

2. 뿌리를 먼저 확인한다

3. 상대의 선의를 먼저 인정한다

4. 근본 원리를 제시한다

5. 양극단 모두 문제임을 보여준다

6. 구체적인 폐단을 제시한다

7. 조종의 법이 중도임을 재확인한다

8. 예상되는 반론을 미리 제시하고 반박한다

9. 결정권을 상대방에게 돌려준다



세종은 어떻게 답했을까?


세종은 이 상소를 읽고 이렇게 답한다.



"마음속 생각을 숨김없이 다 말하였으니,
내가 그 뜻을 가상하게 여겨 자세히 읽어 보았다."

20일 뒤, 다양한 의견이 오고 간 끝에, 결정됐다.


(신하들이 상소문을 올리고 논의함)


법을 세움이 정밀하였고, 관리들이 법을 받들기를 더욱 삼갔다. 임금이 육전(六典)을 깊이 연구하고 《서전》과 《사기(史記)》를 널리 보아서, 생각이 극히 깊고 장원(長遠)하였다. 관직을 오래 맡긴다는 한 가지 일로 여러 사람의 의논이 소란하고, 때마침 가뭄이 또 심하건만 굳게 잡고서 바꾸지 아니하였으므로 마침내 성공의 효과가 있었다. 세종실록 7년 6월 27일


김타를 보며 가장 놀란 것은 그의 '완결성'이었다. 그는 설득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모든 것을 정리해두었다. 왜 이 문제를 말해야 하는가(백성이 근본),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원리는 무엇인가(법이 아니라 사람), 과거에는 어떻게 작동했는가(조종의 3년 제도), 지금 현장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세 가지 폐단), 그렇다면 미래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3년 제도로 복귀). 이 모든 층위가 하나의 상소문 안에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는 단순히 "이건 잘못됐습니다"라고 말한 게 아니라, 과거-현재-미래를 관통하는 하나의 완전한 세계관을 제시했다. 설득은 단편적인 주장이 아니라 완결된 그림이어야 한다는 것을 그는 보여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이 모든 논리를 펼치면서도 결정권은 철저히 세종에게 돌려주었다는 점이다. "부디 성상께서는 이를 잘 살펴서 시행하소서." 그는 강요하지 않았다. 자신은 최선을 다해 생각을 정리해 보여주었을 뿐, 최종 선택은 당신의 몫이라고 말했다. 이것이 진짜 설득이다. 상대방을 몰아붙이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모든 재료를 정확하게 놓아주는 것. 김타는 자신의 역할이 '결정'이 아니라 '제시'임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나는 여기서 배웠다. 설득의 목표는 상대를 이기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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