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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shot Feb 23. 2020

이름 모를
재야의 천재 카피라이터들

당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습니다

카피라이터 

제품 혹은 브랜드의 가치를 함축적인 문구로 대중들에게 전달하는 직업. 대다수 사람들은 광고회사나 홍보회사에서 일하는 전문가 집단을 떠올린다.


잘 만든 광고에 화룡점정을 찍는 한 줄 카피로 유명해진 카피라이터도 많다. 여러 상업 광고와 “사람이 먼저다”라는 정치 슬로건으로 유명해진 정 철 님, Sun Kissed라는 브랜드를 Sunkist로 간결하게 축약하고 오렌지를 ‘마신다’는 개념까지 설계한 클로드 홉킨스 등이 떠오른다. 이런 분들은 굳이 내가 언급하는 게 활자 낭비일만큼 이미 유명하다. 자기 분야에서 정점에 오른 그들의 업적을 존경한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이름 모를 어떤 ‘카피라이터’들을 더 존경한다.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오게 만드는 전어’


생선 좀 먹는다는 한국인이라면 이 문구 한 번쯤 들어봤을 거다. 그저 접하기 쉽고 맛도 좋은 생선이라서 이런 평가가 구전으로 전해지는 걸까? 아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이 문구는 90년대 말 혹은 2천 년대 들어 각종 매체를 통해 가을의 레토릭이 됐다. 그전에 국내에서 전어의 위상은 높지 않았다. 횟집에 가면 메인 요리가 나오기 전 밑반찬 정도로 쓰였지, 결코 사람들은 전어만을 먹기 위해 움직이지 않았다.

남해안에서 전어를 대량으로 유통하는 업자가 만들었는지, 혹은 ‘여섯 시 내 고향’류의 생활정보 프로그램이 가을 어획기의 풍경을 담으며 제일 먼저 썼는지 모를 그 문구 이후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사람들은 가을 전어만을 위해 움직였고, 횟집들은 전어만을 위한 수족관 공간이 생겨났다. '츠키다시(突き出し)’ 신세에서 흡사 아이돌 그룹 ‘센터’가 된 격이다. 전어의 팔자를 뒤집어 놓으신 카피라이터에게 경의를!

◎덧. 한겨레21에서 2012년 ‘각 잡고’ 같은 궁금증을 파고들었지만 속 시원한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


이 문구에 고개를 갸웃거린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자연스럽다. 선선한 날씨와 운치 있는 낙엽 같은걸 상상해보면 한잔의 커피와 함께 책 읽는 내 모습이 그려진다. 사람들은 정말로 가을에 책을 많이 읽었을까?

지난 2017년 문화체육관광부가 내놓은 보도자료를 보면, 206년 한 해 동안 484개 공공도서관 대출 데이터 4천2백만 여 건을 봤을 때 가을의 대출량이 가장 적었다. 월별로 보면 9월<11월<10월 순이다. 가장 높았던 달은 1월과 8월. 아무래도 외부 활동보다 실내 활동이 편할 시기에 책을 많이 읽는 것 같다. 대출이 아닌 판매 역시 마찬가지라고 한다.

혹자는 일제 식민지 시대 총독부 도서관이 전개한 가을 도서관 무료 공개와 같은 캠페인에서 기원을 찾는다. 추론해보면 일제 역시 가을이 ‘비수기’ 임을 알고 그랬지 않을까? 나는 어떤 출판 마케터가 이런 유구한 맥락들을 캐치해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는 함축적인 문구를 완성했으리라 상상한다. 그렇다면 정말 굉장하지 않은가? 듣는 순간 전혀 이질감도 없고,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심지어 낙엽 같은 단어는 언급도 안 했지만 매년 가을 풍경이 바뀔 때면 이 카피가 떠오른다. 


의식은 행동을 지배한다. 실제로 이 카피가 태어나기 전과 후, 가을 독서량 혹은 도서 판매량 비교를 해볼 수 있다면 좋겠다.



기억력이 좋지 않아 두 가지 예시만 들어봤다. 분명한 건 유명 카피라이터가 아닐지라도, 그들이 만든 것보다 훨씬 임팩트 있게 오래오래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카피를 만들어내는 ‘금손’들이 있다는 점이다. 


닿을지 모르겠지만, 재야의 고수들에게 존경의 박수를 보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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